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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니엘라 Sep 09. 2020

육아. 아이의 이야기 주머니


아이가 4일간의 가정학습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일도 익숙해진 것 같더니,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더 익숙하고 즐거운 모양이다.


집에서 지내는 (주말 제외) 4일 간
오래간만에 첫째 아이와 단둘이 시간도 보내고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상황과 상관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아이를 때때로 자제시키기도 했지만, 비교적 풍성한 시간을 누렸다.


가정학습을 하던 어느 날 밤.
아빠는 야근으로 늦고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재워 보려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안방으로 불러 모았다.


작은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큰아이는 밤이 아직 덜 깊었음을 인지 하는 건지
뒹굴거리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이에게 ‘이제 그만 자자!’는 이야기를 스무 번쯤 했을 때,
아이는 자기가 이야기 하나만 하게 해 주면 잠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이는 -
‘할머니와 은혜 갚은 너구리’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어려움에 처한 너구리를 할머니가 도와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흥부와 놀부’에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더하고, 거기에 현대적인 요소까지 가미했다.  결말 부분에서 너구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신문에 나왔고 유명해졌으며, 갑자기 달리기를 잘해서 챔피언이 되기도 한다.


사실은 복잡하고 뜬금없는 사건들이 속출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집중해서 듣기가 어려웠다. 눈을 감고 귀를 아이 쪽으로 향한 채 누워 있었지만, 한번씩 끼어드는 잡생각까지 막아내진 못했다.


그렇게 아이가 이야기를 끝냈다. 짧지 않은 이야기였다.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칭찬의 최대치를 끌어다가 아이에게 해 주었다.
아이는 그제야 만족스러워하며 ‘순순히’ 잠이 들었다.


아이는 어제도 먼저 나서서 자기가 꿈나라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했다. 어제는 솔직히 아이보다 먼저 잠이 드는 바람에 이야기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가 뿜어내는 사랑과 따뜻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https://pin.it/4JoDBSa



그나저나 아이의 이야기 주머니는 언제 이렇게 풍족하게 채워진걸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날들도 참 많지만, 어쨌거나 이야기를 하려는 아이가 참 기특하다.
아이는 요즘 주인공이 누가 되던 간에,
이야기를 자꾸만 엮어보고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다.


아이의 이야기 주머니를 보며
어릴 적 나를 떠올렸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의 할머니께서 엄마에게 해주셨던

그 이야기들과 따뜻함은

엄마와 나를 거쳐,

우리 아이에게까지 전달이 되었다.



아이는 이야기와 따뜻함을 먹고 자랐으며,

이제는

스스로 따뜻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어릴적, 야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며

엄마의 곁에누워 이야기를 들었고,

열이 올라서 등교를 하지 못했던 날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방에 누워

내 곁을 지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할머니댁에 가는 차안에서는 아빠의 썰렁한 최불암 시리즈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 주머니는 풍족하게 채워졌고,

그 이야기들은 아이의 마음밭으로 서서히 스미는 중이다.



아이는 사랑과 따뜻함으로 채워진 이야기들을

자기 것으로 다시 가공하고 자신의 이야기 주머니를 채워간다.



키만 쑥쑥 자라는 줄 알고 있던 우리아이가

마음도 통통하게 살찌우는걸 가만히 지켜보며

대를 이어주는 이야기 주머니가 참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도, 아이에게 무언가를 하기를 권하기 보다는

스스로 다양한 양분을 흡수하도록 지켜보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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