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어릴 적의 기억을
나이대별로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어릴 적 기억을
대부분 새까맣게 잊었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띄엄띄엄
구간별 기억의 조각들이 난무한다.
그 조각을 가져다가 실타래를 풀어헤치면
느닷없는 또렷함이 생겨나곤 한다.
오늘은 큰아이가 처음으로
3학년 2반 교실에 들어서는 날.
새 학기다.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새 학기는 설렌다.
대신 교실에 들어가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다.
1991년 3월의 첫 등교일.
한참을 걸어도 조회대 앞까지 걸어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큰 운동장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하얀 타이즈도 신고
왼쪽 앞가슴엔 방패 모양의 노란색 명찰을
옷핀으로 야무지게 달고 학교로 향했다.
명찰의 윗부분에는 학교의 이름인 ‘상산’이라는 글자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고
명찰의 아래쪽에는 내 이름 석자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노오란 머스터드 색깔의 명찰 아래에는
하얀색 가제 수건이 길게 접혀
명찰과 함께 옷핀에 의지하며 매달려 있었다.
하얀 가제수건은 옷감을 보호를 위한 것이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내미는
콧물을 닦기 위한 것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삐져나오는
눈물을 훔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긴장되고 어지러웠던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이것이 내 기억의 전부다.
2003년 3월의 첫 개강일.
하루 전날 기숙사 방에 짐을 풀고
수차례 함께 들락거렸던 부모님은
이미 지방으로 내려가시고,
눈을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게 웃는 룸메와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첫 강의실 입장이나
교수님과의 첫 만남은 전혀 기억이 없다.
개강 주간이었을 텐데,
학과 대면식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외국어대학 건물의 소강당이었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갈 때마다 그곳은 습하고 눅눅하고 긴장되는 곳이었다.
모르는 선배들이 그득했고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누구의 곁에 앉아야 할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신입생들은 이쪽으로 자리하세요.”
라는 씩씩해 보이는 여자 선배의 안내로
신입생 좌석의 중간 어디쯤 어정쩡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신입생 엠티에서 만났던
분홍 니트가 잘 어울렸던 친구가 다가왔다.
지은이였다.
처음 사귄 동기였다.
뽀얀 피부에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지은이는
말수가 적고 착하디 착한 친구였다.
외모도 차림도 딱 ‘서울 아이’ 같은 친구였다.
우린 4년간 맹숭맹숭하게
하지만 오래오래 우정을 이어나갔다.
눅눅하고 어둑어둑한 강당에서 교수님 소개를 했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고 지루한
선배 소개를 했으며,
살 떨리는 신입생 소개까지 마쳤다.
동아리 소개…? 뭐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작은 조각조차도 기억에 남아있질 않다.
(어쩜 좋아…)
대면식 후 뒤풀이.
신입생을 위한 자리인지
재학생을 위한 자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선배들만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학교 앞의 식당가를 ‘마을’이라고들 불렀다.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당 겸 술집에
단체 예약이 되어 있었다.
각 테이블마다 오삼불고기와 부대찌개인지
곱창전골인지 하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내내 술잔을 피해 다니느라
밥을 먹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한 줌의 기억도 남김없이 자체 삭제를 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날 저녁 나는,
유럽어 학과군 스페인어학과에서
‘앗싸’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기까지가 내 지난 3월의 첫날 들에 관한 기억이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세 번째 3월을 맞았다.
나의 지난 3월 보다
아이의 새로운 3월이 더 설레는
아들 바라기 엄마가 되었다.
오래간만에 직장에서 조퇴를 하고,
아이의 학원 길을 동행했다.
아이는 학급에서 12번의 번호를 부여받았고,
‘친절한’ 여자 선생님을 만났으며
첫날의 느낌이 좋다고만 했다.
그 느낌 그대로
아이의 3월에 즐거운 추억들이 많이 스치기를,
즐겁고 새로운 3학년의 3월, 그리고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