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잠든 시간, 설거지를 잠시 미뤄두고 백지 앞에 앉는다.
쓰고 싶은 마음이 쉬고 싶은 마음과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을 만나 무너지길 여러 번,
'오늘만큼은 쓰기를 먼저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다.
거실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초록 잎들도 반갑고, 공기를 가득 채우는 공사장의 반복적인 기계음, 자동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오늘따라 반갑지 않은 소리가 없다. 게다가 코끝을 살며시 스치는 초록의 향과 공기를 떠다니는 초여름 냄새까지 더해지니 백지 앞을 피할 길이 없다.
내 삶의 그림과 향기, 이 모든 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육아와 살림 살이가 바빠 글을 쓰지 못했다는 핑계는 더 이상 대지 않기로 했다. 어떤 상황에도 쓰고자 하면 쓸 수 있다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대신, 삶의 그림과 향기를 느낄 만한 오감이 닫혀 있었기에 생각도 글도 잠시 멈춰 있었다는 말로 그간의 공백을 설명하고 싶다.
낳아 두기만 하면 잘 큰다는 말은 우리 막내를 통해 또 한 번 증명이 된다.
토실토실 살이 올라 8개월을 꽉 채워가고 있고, 짝짜꿍과 하이파이브는 껌이 된지 오래. 입을 안 벌려 걱정했던 시간이 있기나 했던 걸까 의심스러울 만큼 이유식도 잘 씹어 삼키고, 영원할 것 같던 잇몸미소도 새로 난 여섯 개의 치아 덕분에 좀 더 사람다운 미소로 바뀌어 간다. 네 발로 기는 건 인간이 거쳐야 할 필수 코스인 만큼 착실히 기어다니며 집안의 온갖 물건을 물고 빨고 하며 탐색전까지 부지런히 벌인다. 신체 발달에 대한 갈망이 큰 타입인지 자꾸만 소파와 사람을 짚고 일어서서 발자국 떼는 시늉을 한다. 거기에 맘맘맘마, 엄맘마마, 엄마~아~ 소리를 내며 발성연습까지 시작된 바람에 24시간 사람 향기가 솔솔 나는 집이 되어 버렸다.
잘 커주니 고맙고, 덕분에 오래오래 일하며 돈 벌어야지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큰아이 둘은 조연이 된 것 같은 라이프 사이클을 지나고 있지만, 각자는 또 존재감을 뿜뿜 내뿜는 중이다. 첫째는 여전히 축구에 올인 중이고 칭찬을 하자면 요즘은 매주 월요일 본인이 할 일에(공부) 대한 체크리스트를 작성해(엄마와 함께) 저녁시간에 체크해가며 알아서 공부를 하는 능력치를 얻었다. 중간중간 딴짓도 추가되지만 그래도 알아서 해주는 우리 집 넘버원이 참 고맙다.
둘째 어린이는 일곱 살인 데다가 막내도 아닌데 여전히 귀엽다. 귀여움이 반짝인다 정말. 목소리도 귀엽고 동생을 예뻐하는 모습도 귀엽다. 한글을 알아서 술술 읽길래 한글 천재인 줄 알았더니만, 마트 놀이를 하면서 간판을 좀 써보라 했더니 쓰기 영역은 낙오점인 것을 알아채 버렸다. 예를 들면 '맛있는 마트'를 '마신는 마트(심지어 '트' 글자는 거울 글자)'라고 쓰는 등. 그래도 웃음 꾹 참고 재미있게 놀이를 끝내는 걸 보면 내 마음도 참, 첫째 때랑 달라도 너무 달라. 하하..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싶고 태권도 학원도 다니고 싶고 눈높이 수학도 하고 싶다던 둘째를 조금 진정시켰다. 다 해주고 싶지만 다 해주기엔 재원도 시간도 부족하다. 축구를 배우고 있으니 태권도까지 다니는 건 좀 무리고, 피아노는 나중에 예쁜 여자친구를 사귀어야 하니까 가르치기로 했다. 그리고 눈높이는 여름 방학이 될 때까지는 코높이교육(요한이와 내가 지은 엄마표 교육의 별칭이다.)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아이 셋을 키우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속 시원히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자꾸만 생긴다.
오래오래 돈 벌어서 필요한 것들은 채워줄 수 있는 엄마 아빠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또 한 번 구르르르릉 차오른다.
아무래도 오늘 글은 기승전‘돈벌자!’인게 분명하다.
안 보던 예능들을 티빙 덕분에 종종 찾아보기 시작했다. 요즘 최애 프로는 '부산 촌놈 in 시드니'이다. 땀방울이 맺힌 프로그램인데다가 우리의 신혼여행지였던 시드니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라 몰입감으로 치면 나도 뭐 거의 같이 워홀 중인 느낌이다. (그나저나 결혼 10주년 때 남편과 시드니로 다시 여행 가기로 했던 일이 다시 생각이 나네.....ㅎㅎㅎ 시드니 대신 경주에 가긴 했지만 말이다.)
하여간 예능을 다시 보기 시작하니, 멍 때리는 시간이 줄고 그만큼 내 생각을 키울 시간이 줄어든다.
빨래 갤 때를 빼고는 보지 않는 게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든다.
애앵행~
막내의 울음소리가 한 박자 울리고 지나간다. 곧 두 번째 세 번째 울림이 이어질 예정이다.
시간과 백지와 나의 오늘 차 여행을 마칠 시간이다.
일단 설거지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