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2. 아이에 대한 악몽에 시달릴 때, 엄마는 반성을 합니다.
최근, 첫째 아이가 크게 다치거나
첫째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는
꿈을 꾸곤 한다.
지난밤에도 아이가 크게 다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주저앉은 채 울며 아이를 안고 있었다.
구급차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고,
멀리 있을 남편만 애타게 불렀다.
꿈속에서 더 이상의 끔찍한 장면은 연출이 불가능했던지
나는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무사한지 확인을 했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었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생생하게 잔상이 남아 있는 꿈을 곱씹으며
아이들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희생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서 아이들을 돌보았던 내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꿈의 끝에 내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은
죄책감이 주를 이룬다.
최근 아이들을 케어하며
‘훈련 조교’에 가까운 나의 모습을 마주 했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수식어를 달았지만,
결국은 나의 욕심이 투영되어 있었고,
나의 편리함을 위해 아이들을 움직이게 했다.
특히나 첫째 아이는
말귀를 더 잘 알아듣는 나이가 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지면서
오히려 더 다그침을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아이들이 하교 및 하원 후 돌아오면
잠들기 전까지 미션을 수행해 내듯 아이들을
‘빨리빨리’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비교적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저녁식사를 기점으로 아이들은 바빠지기 시작한다.
숙제를 하고,
매일 조금씩 하는 수학 문제를 풀고,
샤워하고 양치하고
잠자리 동화책을 들고 침대에 모이는 일까지가
나에게는 미션으로 느껴진다.
아이들의 생체리듬이나 기분은 크게 고려되는 법 없이
엄마가 요청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
하루 건너 하루씩 반성을 하면서도
비슷한 날들이 반복되었다.
조금 늦게 잔다고 생사가 갈리는 것도 아니고,
샤워를 하루 하지 않는다고 큰일 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엔 걱정 인형들이 잔뜩 웅크리고는
‘아이들을 위해서, 빨리 해야 해.’의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나 자신이 아이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숨통도 조여들었다.
풀리지 않고 엉켜 있던 그 마음들이
깊은 밤 꿈속에서 날뛰곤 했다.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나에 대한 실망스러움이
꿈속에서 어두운 그림을 그려냈다.
아이가 커 갈수록 더 힘이 들 거라는
육아 선배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몸은 조금 더 편해지고 자유로워졌지만,
아이들이 자라며 고민할 것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아이들의 자유의지와 엄마의 의지 사이에 일어나는 줄다리기는 어찌나 골치가 아픈지...
오늘은 또다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나를 옥죄었던
끈들을 조금씩 풀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은 ‘기다림’이 필요할 때다.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타협도 할 줄 아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들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