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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비빌 언덕, 아빠.

by 다니엘라


아이와 환한 대낮에 책을 읽는다.


형아가 태권도 학원에 간 사이
먼저 하원을 한 둘째는 4-50분 간 엄마를 독차지한다.
좋아하는 간식을 한 손에 쥐고,
좋아하는 책을 펼친 후 엄마 무릎에 살그머니 와서 앉는다.


아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까만 크레파스와 괴물소동] 책을 읽고 있던 며칠 전의 일이다.

크레파스들이 주인공인 이 그림책은 첫 장면부터 친구 크레파스를 찾는 모습이 나온다.
오늘은 노란 크레파스가 없어지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황토와 갈색이가 없어진다. 하루씩 지나며 친구들이 서서히 사라져 마지막엔 까망이 혼자 남게 된다.
이야기의 전개는 어찌 보면 공포물에 가깝지만, 결국 남은 까망이가 친구들을 찾고 그들과 함께 생쥐네 가족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며 행복을 가져다주는 훈훈한 결말의 그림책이다.


여하튼, 첫 장면에서 친구들이 노랑이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둘째 아이가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코를 달고, 동그란 눈으로 “엄마, 아빠는 노랑이 찾을 쮸(수) 있지요오~? 우리 아빠는 노랑이 찾을 쮸 이쯜뻔 했는데(있을 뻔했는데.. 요즘 둘째 아이가 자주 쓰는 말).” -쉽게 말해 우리 아빠는 노랑이 찾을 수 있다는 뜻;;

뜬금없이 튀어나온 아빠 이야기였지만, 엄마는 또 금방 적응을 해야 하니까...
“그럼 그럼~ 아빠는 다 찾을 수 있지.”

[까만 크레파스와 괴물소동-나카야 미와]의 첫 장면


책을 읽는 내내 아이는 “우리 아빠는 ㅇㅇ이 찾을 쮸 있지요오~?”를 반복했다.


가만히 듣고 보니,
아이에게 아빠는 만능맨이었다.
아빠는 커다란 사람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릴 적 아빠를 향해 가졌던 그 마음을
우리 아이도 똑같이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엔
둘째가 평소와 달리 생떼를 써서 야단을 치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얼굴로
“아빠~ 아빠~ 아~빠~~!!
아빠한테 갈 거야~~.” 하며 울었다.


비록 회사에 출근 해 있는 아빠였지만,
아이에겐 어쨌거나 확실한 ‘비빌 언덕’이었다.


깜깜한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울 시간이 되면 엄마가 최고라고 엉겨 붙는 꼬마이지만,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빠를 먼저 찾곤 한다.
아이에게 아빠는, 늘 자기편이 되어주는 사람이고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아이도 다 안다.
엄마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지만,
아빠는 모든 걸 받아줄 수 있으며, 사랑의 눈길을 끊임없이 보내주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릴 적 내가 우리 아빠를 보며 그랬듯
아이도 아빠를 ‘크고 멋지며 다정한 사람’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어릴 적 나는,
아빠의 퇴근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아빠가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던 ‘깐돌이바’며 ‘호빵’이 좋은 이유도 있었지만, 크고 든든한 아빠가 오셔야 집안이 한층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아빠의 존재 자체가 평온함을 상징했고,
아빠의 등장과 동시에 나에게 남은, 잔여의 불안감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


천둥 번개가 집 안팎을 뒤흔드는 날이면,
엄마를 졸라 아빠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언제 오세요?”


아빠의 숙직 날엔 엄마와 언니 손을 붙잡고 아빠 사무실에 간식을 가져다 드리러 갔었고,
간식을 건넨 빈손에는 봉봉이나 쌕쌕 주스를(그리고 가끔은 복숭아 넥타를) 하나씩 쥐어 주셨는데, 그 주스 한 캔을 꼴깍꼴깍 마시며 아빠의 부재에 대한 위로를 받았다.


어떤 일이 닥쳐도 아빠를 생각하면 든든했고 겁날 것이 없었다. 그리고, 키가 아주 큰 우리 아빠라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 슈퍼맨 같은 아빠 덕에 나의 성장기에는 큼직한 두려움이나 좌절 따위가 자리 잡을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물론 시간이 한참 흘러
아빠가 이전보다 훨씬 작아진 것을 깨달은 날이 오고야 말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아빠는 긍정이고 든든함 그 자체이다.


우리 아이에게도 그런 아빠가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그러고 보면,
자녀들이 번듯하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아이 곁을 지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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