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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별을 보며 잠이 들던 밤

Day 59, 60 - 미국 철도 Coast Starlight

by 바다의별

2017.04.01


나는 기차 타는 것을 좋아한다. 비행기보다 덜 번거롭고 버스보다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내 개인적인 취향이다.


Coast Starlight은 미국 서부 시애틀에서 LA까지 운행되는 열차 구간으로, 알래스카 철도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철도 노선 중 하나이다. 시애틀에서 LA까지는 2일 정도가 소요되고, 시애틀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2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사실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 가는 길에 보이는 해안선이 가장 유명하지만,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러야 했으므로 시애틀-샌프란시스코 구간만을 예약했다.


좌석은 일반 기차처럼 쭉 앉아서 가는 저렴한 좌석을 예약해도 되고, roomette라는 이름의 침대 칸을 예약해 밤에는 좌석을 침대로 만들어 누워서 가도 된다. 침대칸을 예약했을 때의 장점은 3끼 식사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예산도 중요했지만 침대칸에서 한 번쯤 자보고 싶기도 했기에 돈을 조금 더 들이는 선택을 했다. 식사도 가격 고민 없이 원하는 대로 주문할 수 있으니 그것도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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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출발 전날, 시애틀에서 친구와 함께 있는 동안 연락이 왔다. 산사태로 인해 일부 구간이 변경되었다는 이메일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전화를 하라고 나와있어 친구 휴대폰으로 전화해보니, 출발 시간과 역은 같지만 시애틀-포틀랜드 구간은 기차가 아닌 버스로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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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시애틀 기차역에서 준비된 버스를 타고 포틀랜드로 갔다. 버스가 기차보다 빨랐다. 기차로는 4~5시간 걸리는 거리였는데, 버스는 3시간 정도 걸렸다. 시간이 꽤 남았는데 침대칸이라 라운지를 쓸 수가 있었다. 별건 없었지만, 앉을 곳도 있고 음료수도 제공해주어 나름대로 기다리는 동안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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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차 탑승. 침대 칸에는 평범해 보이는 좌석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문도 있고 커튼도 있고. 각 차량마다 승무원도 있었다. 마주 앉는 의자를 혼자 다 쓸 수 있으니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어 좋았다. 밤이 되면 두 의자가 붙어 침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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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치는 특별할 건 없었다. 그래도 천천히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매일 밖에 나가면 지도를 수시로 확인해보고 계획을 수정해가며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돌아다녀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어도 기차가 데려가 주고, 배가 고프면 식당칸에만 가면 식사가 해결되었으므로. 원래는 글도 쓰고 밀린 계획들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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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철도와 비교했을 때 풍경은 알래스카 철도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지만, 식사는 그 반대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알래스카 철도와는 달리, 이곳은 매 식사가 기대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디저트로 초콜릿 케이크를 포장해와서 노트북에 담겨있던 영화 한 편을 틀어보았다. 진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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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8시쯤이 되자 승무원이 왔다. 좌석을 침대로 만들어주러. 원래 이 칸을 둘이서 쓰면, 위에서도 침대 하나가 또 나온다. 옆의 수납칸이 계단 역할을 해주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밑에 의자 두 개만을 붙여 침대 하나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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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불을 끄니, 바깥의 달과 별들이 잘 보였다. 밤이 되니 기차는 더 로맨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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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래스카 철도의 전망이 훨씬 좋다고 생각했지만, 밤이 되자 이 열차도 굉장히 포근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의 달과 별들을 보며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낭만적이고 행복했다. 기차가 달리는 중이라 사진은 제대로 찍히지 않았지만,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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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지나 햇살이 잠을 깨워주었다. 실내 캠핑을 한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 하지만 즐겁게 내렸다. 사촌언니가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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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메모 #

* 이동 중에 즐기는 휴식. 여행이 길어지니 여행으로부터의 휴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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