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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 마을

Day 83 - 모로코 쉐프샤우엔 (Chefchaouen)

by 바다의별

2017.04.25


마라케시가 장밋빛이었다면, 북쪽에는 푸른 마을이 있다. 건물들이 온갖 종류의 푸른색으로 칠해진 마을, 쉐프샤우엔이다. 페스에서 쉐프샤우엔까지는 서너 시간 정도 걸린다. 마라케시에서 하루 종일 기차를 타고 온 다음날 가려하니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는데, 알고 보니 가이드 투어도 아니고 그저 차로 픽업해서 데려다 줄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버스를 예약해서 갈 걸. 그래도 버스 터미널을 찾고 시간을 알아볼 필요 없이 편하게 다녀왔으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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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는 나 말고도 미국인 커플과 콜롬비아에서 온 여자 친구 둘이 탔다. 가는 길에 빨간 양귀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작고 노란 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설렜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전망을 보는 포인트에서 잠시 내렸는데, 날이 흐려서 아쉬웠지만 저 멀리 하늘색 건물들만 모여있는 마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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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보면 약간 들쑥날쑥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푸르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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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을에서 3시간 반 정도를 보내기로 했다. 사실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입구에는 기념품 가게만이 가득했고, 그래서 상인들이 마라케시에서처럼 호객행위를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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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재빨리 깊숙한 골목들로 걸어 들어가 보았다. 상점 거리를 벗어나니 곳곳에 예쁜 곳들이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온갖 종류의 푸른빛이 칠해져 있었고, 때때로 그 속에는 톡톡 튀는 원색 또는 파스텔톤의 빛깔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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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쉐프샤우엔에 대해서 가장 오래 고민했던 것 같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오래 있기엔 금방 질릴 것 같고, 잠깐 다녀오자니 페스에서 편도로 서너 시간 가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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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스페인의 프리힐리아나라는 하얀 마을과, 그리스 산토리니의 하얗고 푸르른 이아마을에 갔을 때 조금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래도 이아마을은 바다도 내려다 보이고 산토리니 섬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좋았지만, 프리힐리아나는 사진 몇 장 찍고 나니 별로 할 게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과연 쉐프샤우엔이 왕복 7~8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갈 만한 곳일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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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촬영지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있어도 관광지로서의 가치는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물론 매우 주관적인 이야기이다.

DSC08238001.JPG 이곳은 프랑스어가 아닌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조금 색다른 골목길을 보고 싶다면, 그 속에서 소위 말하는 '인생 샷'을 남기고 싶다면, 이보다 멋진 포토존은 없을 것이다. 푸르게 칠해진 벽과 계단들만으로도 예쁘지만, 곳곳에 함께 놓인 색색의 화분들과 그림들이 골목들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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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쁜 마을'이 아니라 '특별한 마을'을 기대했다면, 사진 촬영에 특별한 흥미가 없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가게와 식당 앞에는 호객 행위하는 상인들이 서 있고, 예쁜 골목에는 관광객들(나 포함)이 사진을 찍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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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곳이다. 사진들 외에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관광객이 없던 깊숙한 골목에서 마주친 한 아이가 쑥스럽게 웃으며 나에게 중국인이냐고 물어본 일 뿐이라서. 웃으면서 한국인이라고 답하니 소년은 내 말을 알아듣긴 한 건지 다시 웃더니 쏜쌀같이 어디론가 뛰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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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쉐프샤우엔은 사람이 붐비는 평범한 동네라는 것이다. 색이 이토록 푸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소년과 같은 사람들만 있었을 그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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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관광지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하니, 어느새 나는 점점 위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계단을 따라 계속해서 천천히 올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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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푸른빛들도 좋았고, 저 멀리 보이는 초록 산맥들도 시원했다. 다시 내려가는 길에 자꾸 마을 반대편이 나와서 한참을 헤맸지만, 이미 충분히 본 마을의 모습이 아닌 다른 곳들도 살펴볼 수 있어서 그것도 그것대로 재미있었다. 대체 이 작은 마을에서 왜 그렇게 헤맸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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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는 와중에도 고양이 사진들을 찍었다. 모로코는 참 고양이가 많은 나라다. 개인적으로 강아지는 무척 좋아하는 한편 고양이는 살짝 무서워하는데, 모로코에서 하도 많은 고양이를 봐서 이제는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라도 무서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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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분간 헤매고 점심식사까지 했는데도 주어졌던 3시간 반을 채우지 못했다. 구경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골목들을 다시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인생샷'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 자연스러운 촬영장에서 사진을 남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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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메모 #

* 나에게 있어 좋은 여행지란, 본 것을 통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느끼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예쁘다기보다는 매력적인 곳.
* 나에게 있어 예쁜 마을에 간다는 것은 원목 가구를 놓아둔 카페, 은은한 촛불을 밝힌 레스토랑, 또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갤러리에 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것 또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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