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95 - 크로아티아 라스토케(Rastoke), 슬룬(Slunj)
2017.08.15
전날 늦은 시간까지 재즈 페스티벌을 즐기며 후회 없이 풀라 일정을 마무리하고, 크로아티아의 꽃인 플리트비체(Plitvice)로 이동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리트비체에서 차로 30분가량 떨어진 슬룬(Slunj)에 갔다. 플리트비체 입구에는 짐 보관소가 있어 곧장 가서 구경해도 되지만, 그렇게 급하게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슬룬에서 머물며 다음날 필요한 짐만 챙겨서 플리트비체에 가기로 했다. 슬룬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 가까이에는 슬룬보다 더 작은 마을인 라스토케(Rastoke)가 있는데, 아기자기하여 플리트비체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곳에 많이 머문다. 나는 예쁜 마을에 머물고 싶은 마음보다도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슬룬을 택했다.
풀라에서 슬룬까지 직행은 없었다. 나는 중간에 동네 슈퍼만 한 크기의 터미널에서 내려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낸 뒤 버스를 갈아탔다. 만약 내가 라스토케나 플리트비체까지 갔다면 슬룬에서 또 갈아탔어야 했다. 두 번을 갈아타고 싶지는 않아서 슬룬을 택한 것이다. 슬룬은 터미널조차 없고 그저 정류장이 전부였는데, 정류장에서 가까우면서도 라스토케보다 저렴했던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깔끔하고 방도 넓었다.
슬룬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4시가 넘어있었다. 이날 하고자 했던 것은 라스토케를 둘러보는 것뿐이었기에 나는 해가 지기 전 서둘러 구경을 마치고 오랜만에 이른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슬룬은 인구가 5천 명이고, 라스토케는 70명 남짓이라고 한다. 두 마을은 도보로 20분 거리이지만 인도가 아주 좁게 난 찻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대신 경치가 좋았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다음날 방문할 플리트비체의 예고편 같았고, 건너편에 보이는 성은 그 안을 서성이는 사람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어서 눈이 부셨다. 카메라 화면은 더 눈이 부셔서 내가 무얼 어떻게 찍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진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유럽 전역에 '동화 속 마을'이라고 칭해진 곳들이 굉장히 많다. 라스토케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은 동화 속 마을에 다녀와서 시큰둥해졌는지, 나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왕복 40분간의 산책으로 얻은 보너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전 기대를 마음속에서 지우고 나니, 마을 안에 흐르는 물과 뒤에 있는 낮은 산들이 더 예뻐 보였다.
사실 풀라에 머무는 동안 꼭 가보고 싶은 동네가 있었다. 흄(Hum)이라는 동네였는데, 주민이 10명도 채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네라고 한다. 당연히 볼거리는 별로 없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네'라는 타이틀이 호기심을 자극해 꼭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갈 방법이 전혀 없었고, 그런 외진 곳에서 우버를 부르는 것 또한 모험인 것 같아 포기했었다. 라스토케는 그런 곳에 가보고 싶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대신 해소해주었다.
짧은 여행 일정 중에 들르고자 한다면 굳이 추천해주지는 않을 것 같다. 바쁜 여행자들이 플리트비체만 구경하고 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여행이 길다면 조금 구석진 곳들까지 둘러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때로는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고 때로는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직접 가보기 전에는 결말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묘미니까.
# 사소한 메모 #
* 예상치 못했던 기쁨과 예상에 어긋나는 실망이 반복된다. 어느 쪽이든 반전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 산책 후 마신 시원한 맥주는 체코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크로아티아는 와인이 훨씬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