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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Apr 21. 2018

마지막 시작, 멜버른 탐방

Day 215~218 - 호주 멜버른(Melbourne)

싱가포르 마지막 날, 숙소에서 무료로 오후 1시 체크아웃을 해줘서 나는 오전에 푹 쉬고 부모님은 근처 공원 산책을 다녀오셨다. 오후에는 함께 옷과 소품 구경을 하며 쇼핑몰들을 돌아다니다, 저녁에 공항에 갔다. 나는 새벽 1시 15분 출발, 부모님은 밤 10시 50분 출발이어서 헤어진 후 공항 터미널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역시 이럴 때 유용한 건 공항 라운지. 라운지에는 우리나라 컵라면도 있고 안마의자도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기다리다가 게이트로 향했다.

그런데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여권 검사를 했는데, 검사하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옆에 있던 남자에게 "이 사람이야?"라며 내 여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호주 이민국에서 왔다던 남자는 맞다며 내게 이쪽으로 잠시 오라고 했다. 그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수하물로 부친 배낭에 무언가가 있었나?', '호주 입국이 까다롭다던데 내가 뭔가 잘못할 게 있나?'등등. 하지만 남자는 호주에 얼마 있을 건지, 무슨 일로 가는 건지, 싱가포르에서는 뭘 했는지 정도만 물어보고는, 좋은 비행 하라고 해주었다. 혹시 왜 내가 걸렸는지 물어보니 그냥 랜덤이랬다. 그냥 배낭 메고 오래 여행해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멜버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프리카에서 만났던 자넬&크리스에게 연락했다. 멜버른 시내에서 며칠 묵은 뒤, 주말 동안에는 외곽에 있는 그 친구들 집에서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집에서는 멜버른 시내에 혼자 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선 나는 시내에서 멜버른 구경을 하고, 금요일 휴가를 낸 뒤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첫날은 피곤해서 호주의 버거킹인 '헝그리 잭(Hungry Jack's, 호주에는 이미 버거킹으로 등록된 사업이 있어서 다른 이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에서 와퍼 세트를 먹고 쉬었고, 다음날은 정말 좁은 골목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맛집이라고 해서 갔는데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좁은 통로에 위치한 식당이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좋았던 한 가지는 현지식을 먹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호주의 현지식이란 뭘까.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마저도 영국에서 온 '피쉬 앤 칩스'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고 했다.

9월 초, 멜버른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아 꽤 추웠다. 뜨끈한 쌀국수로 몸을 데우고 그래피티로 유명한 호이저 거리(Hoiser lane)로 향했다. 우리나라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하다>에 등장해서 유명하다는데, 나는 그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흐린 가운데 이 골목만은 활기찬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 그림들은 주기적으로 바뀐다고 한다. 거리 아티스트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그림으로 덧칠을 하는 모양이다. 

오후에 무얼 할까 고민하다 야라(Yarra) 강을 건너보기로 했다. 날이 흐리고 빗방울까지 떨어져서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내가 멜버른에 있는 동안은 날씨가 계속 이럴 것으로 예보가 되어있었다. 강 건너서 멜버른 시내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유레카 스카이 데크 88(Eureka sky deck 88)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강을 건너지 못했다. 위 사진은 강을 건너다 찍은 사진이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사진이 저렇게 찍혔다. 바다와 다름없다는 인천 송도에서 5년 가까이 살면서 어마어마한 바람을 많이 맞아봤는데, 그럼에도 놀라운 바람이었다. 게다가 잠시 후에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숙소에 가서 우산을 챙기는 것이 시급했다. 바람에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휘청거렸다.

숙소에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두어 시간 쉬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바람이 많이 잔잔해져 있었다. 비도 거의 그친 듯했다. 포기하고 되돌아갔던 다리에서 정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유레카 스카이 데크 88은 이름 그대로 88층에 위치하고 있는 전망대이다. 자넬이 추천해줘서 가보기로 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도시가 차갑게 느껴져 여전히 한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해 보였다. 나는 이곳에서 간식을 먹으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날이 흐려서 석양은 볼 수 없었지만, 금세 어두워진 도시의 야경은 기대 이상으로 멋졌다.

차가워 보였던 도시가 촘촘하게 빛나니 금세 따뜻해졌다.

멜버른은 토론토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볼거리가 많다기보다는 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밤에 빛나는 모습은 뉴욕 맨해튼의 야경만큼이나 화려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엣지 익스피어런스(Edge Experience)라는 것이 있었다.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작은 큐브 안에 있으면, 젠가 게임을 하듯 큐브가 살짝 밖으로 나와서 한동안 서 있다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찔해 보였는데, 나는 겁이 많아서 해보지 않았다.

전망대에서의 구경을 마치고 내려왔다. 화려하지만 정돈된 멜버른의 밤, 비가 그친 강가의 야경이 브루클린을 떠올리게 해 왠지 반가웠다.


이틀 뒤, 나는 곧 있을 울룰루 캠핑 투어를 대비해 양말을 사러 퀸 빅토리아 시장(Queen Victoria Market)에 갔다. 시장은 꽤 넓었고 생각보다 저렴한 물건들이 많았다.

마켓에서는 왕립 전시관(Royal Exhibition Building)으로 향했다. 내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멋진 건물 하나쯤은 가보고 싶었으니까.

왕립 전시관은 칼튼 정원(Carlton Gardens) 내에 있는데, 정원은 아직 정돈되지 않아 우중충해 보였다. 겨울이 완전히 가고 봄이 오면 화사해질 테다. 

멜버른이 살기 좋은 도시라고 여겨졌던 건, 관광객인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무척 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이곳에서 교통카드조차 구입하지 않았는데, 멜버른 중심가는 트램이 무료였기 때문이다. 중심가 바깥쪽으로 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교통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간혹가다 까먹고 벌금을 무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다. 멀리 나갈 일이 없었던 내게는 최고의 도시였다.

낮에는 멜버른 시내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블록 아케이드(Block Arcade)는 무려 100년이 넘은 쇼핑 골목으로 지금은 관광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이다. 나는 친구가 추천해준 찻집에 가기 위해 이곳에 갔다.

이탈리안 음식이 먹고 싶었던 차에 한 식당의 오늘의 메뉴에 펜네 볼로네즈가 있는 것을 발견해 들어갔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서 기분 좋게 점심 식사를 한 뒤, 친구가 추천해준 홉툰 티룸(Hopetoun Tea Rooms)에 갔다. 홉툰 티룸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기 명소였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멜버른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이라고 했다. 나는 은은한 레몬 향의 차와 달콤한 피칸 타르트를 먹었다. 분위기를 즐기며 오래 앉아있고 싶은 곳이었지만 밖에 계속 줄이 길게 있어서 서둘러 먹어야 했던 것이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차를 다 마시고 나오니 어느새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ACMI(호주 영상 박물관, Australian Centre for the Moving Image)에 들어가 보았다.

볼거리도 할 거리도 많아서 꽤 오랜 시간을 신나게 보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과학관에 들어갔다가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컴퓨터 게임은 물론 VR 체험도 할 수 있었고 다양한 영상 촬영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매트릭스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총알을 피하는 것처럼 내가 주인공이 되어볼 수도 있었다.


내가 멜버른 시내에 머무는 동안 날은 계속 흐렸다. 하루 동안 계절이 네 번 바뀐다는 멜버른은, 내게는 추운 계절만을 보여주었고, 봄은 딱 한 번 있었다. 그런데도 비바람 몰아치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흐린 줄도 몰랐다. 날씨 외에 맑은 곳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 사소한 메모 #

* 어둑어둑해도 그 속에 작은 재미들이 많아서, 그리고 앞으로 호주에서 있을 수많은 만남에 설레기만 해서, 마냥 기분이 좋았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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