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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폭폭 기관차 타고

Day 219 - 호주 멜버른(Melbourne) 근교

by 바다의별

어느새 크리스와 자넬의 집에 가는 날이 되었다. 신혼여행으로 아프리카 캠핑을 했던 멋진 친구들이다. 친구들의 집은 멜버른 근교인데 가장 가까운 이웃집이 거의 500미터 떨어져 있을 정도로 외진 숲 속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시내 호텔에 머물며 멜버른을 구경했고, 다섯째 날인 금요일 아침, 휴가를 낸 크리스가 나를 데리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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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 너무나 반가웠다. 생각해보면 고작 3개월 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아프리카에서 5주 동안 매일 24시간씩 붙어있다 3개월을 떨어져 있는 건 상대적으로 엄청난 헤어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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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에서 못 가본 곳이 있냐 해서 해변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세인트 킬다 해변(St. Kilda beach)에 데려가 주었다. 우리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모래 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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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는 친구들 집 근처의 단데농 산(Mt. Dandenong)에 가서 멜버른과 근교 전망을 보았다. 이런 산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탁 트인 전망이 유레카 타워에서 본 빽빽한 도시와는 달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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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멜버른 중심가에만 고층 건물들이 삐죽삐죽 모여있고 그 주변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맨날 똑같은 옷에, 캠핑해서 서로 피곤한 모습만 보다가 호주에서 보니까 뭔가 좀 다르네."
"진심이야?"
"음... 사실 호주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큰 차이는 없는 것 같기도 해."
"여기도 막상 와보니 그렇게 도시 같지 않지?"
"응, 그리고 너 그 옷 아프리카에서 입었던 옷 아니야?"
"네가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야."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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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내게 보여주고 싶은 곳들이 많았던 것 같다. 바로 집으로 가기는 아쉬웠는지, 집 근처 에메랄드 호수(Emerald Lake Park)에도 들러보았다. 여름에는 수영하러 온다고 했다. 정확히는 호수가 아니라 호수 옆 수영장에서 수영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수질 보호를 하면서 물놀이도 할 수 있는 묘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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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넬의 부모님 댁이 이 근처라고 했는데 부모님께서는 여행 가셨다고 했다.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 들었다. 다음날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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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5개짜리 2층 집인 친구들의 집은 완전히 숲 속에 위치해있었다. 집이 아니라 별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내게 내어준 방은 마음에 쏙 들었고 숲이 보이는 전망도 좋았다. 방에 짐을 가져다 두고는 1층 거실에서 친구들의 강아지(라고 하기엔 매우 큰) 티그와 놀았다. 벽난로 근처에는 자넬이 아프리카에서 찍은 사진들을 큼지막하게 인화한 사진들이 있어 추억에 잠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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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넬은 회사 일이 바빠서 오전에는 출근하고 오후에 휴가를 내고 집에 왔다. 오전에는 크리스와, 오후에는 자넬과 둘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자넬의 퇴근이 생각보다 늦어서 우리는 만나자마자 껴안기가 무섭게 차에 올라타 퍼핑 빌리(Puffing Billy) 탑승 역까지 열심히 달렸다. 집 근처에도 역이 있지만, 친구들은 이왕 타는 거 출발역부터 종착역까지 풀코스로 타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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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우리를 기차 출발 시간 2분 전 가까스로 역 앞에 태워다 주고, 기차가 지나는 길목까지 다시 달려가 우리가 탄 기차를 기다렸다. 나와 자넬이 두 다리 내놓고 기차를 타고 있는 모습을 찍어주기 위해. 아프리카에서도 느꼈지만 크리스는 자넬 말이면 뭐든 다 들어주는 1등 신랑이다. 때로는 극한직업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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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추워서 창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뿐이었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퍼핑 빌리는 원래 이렇게 타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창문은 막혀 있지 않고 오히려 잡고 탈 수 있는 난간이 있고, 바람을 막기 위한 비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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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달 자동차와 추돌 사고가 일어나 네 명이 다쳐, 당분간 다리를 내놓고 타는 일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찻길과 기찻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차가 옆으로 기울어져,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사람들을 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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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핑 빌리는 멜버른 근교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다. 19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노선으로 지금은 9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는 인기 관광명소이다. 전체 노선은 약 2시간 정도 걸렸는데, 특별한 볼거리는 없어도 평화로운 전원 풍경과 숲이 눈을 정화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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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한번 길게 정차하기에 우리는 역에서 감자전(감자빵, potato cake이라는데 감자전이나 마찬가지였다)을 사 먹었다. 커피와 함께 감자전이라니, 신선한 조합이었지만 거대한 감자튀김을 먹는 것이라 생각하니 또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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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잠시 안쪽에 앉기로 했다. 비닐로 창문을 덮으니 바람소리가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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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 수다를 열심히 떨다 갑자기 자넬이 벌떡 일어났다. 몬벌크 트레슬 브리지(Monbulk Creek Trestle Bridge)에 거의 다 왔다며, 사진 찍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 오래된 목재 다리는 퍼핑 빌리의 대표적인 사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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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지나는 도로에는 가끔 자동차들이 서서 기차가 오길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기도 한다고 했다. 빗방울도 떨어지고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사진이 흔들려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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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동안의 여정이 모두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오랜 지역 명물을 지켜내기 위한 주민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가끔 이벤트로 '토마스와 친구들'의 토마스 기관차가 등장하기도 한다던데, 나중에 토마스를 탈 수 있는 날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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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동네 펍에 가서 캥거루 스테이크를 먹었다. 코알라는 보호종이지만 캥거루는 개체 수가 5천만 마리에 이르러 오히려 먹기를 권장하고 있다고 했다. 특유의 야생 고기 냄새가 조금 났지만 생각보다 부드럽고 맛있었다. 아이슬란드에서 먹은 말 스테이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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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온갖 종류의 호주 맥주를 마시며 호주 풋볼 AFL 경기를 봤다. 결승 시즌이 시작되는 경기였는데, 자넬과 크리스의 서로 다른 응원 팀이 맞붙는 경기여서 엄청 살벌했다. 원래는 나와 함께 경기장에서 보려고 표를 예매하려고 했었다는데 경쟁이 치열해 실패했다고 한다. 가서 봤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더 살벌했으려나? 결국 자넬이 응원하는 팀이 이겼고 둘은 대화 양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자넬이 응원한 리치몬드(Richmond) 팀은 결국 지난해 최종 우승을 거머쥐었고, 자넬은 팀의 열성 팬인 그녀의 90세 할머니와 함께 경기장에서 우승 장면을 직접 관람했다. 경기 규칙마저 다 까먹었지만 나까지 괜히 뿌듯해지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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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한 메모 #

* 지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오래된 기차를 계속해서 달리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퍼핑 빌리를 타고 볼 수 있는 풍경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애정, 같은 칸에 타고 있던 귀여운 할아버지 역무원, 그리고 함께 해준 친구들 덕분에 더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창문 밖에 두 다리를 내놓고 앉아 철없는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던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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