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언젠가 걷히는 법

얼떨결에 아빠와 둘이서 첫 여행 2 - 속리산 말티재

by 바다의별

아빠와의 여행, 첫 목적지는 속리산 말티재 전망대였다. 단풍을 보기에 살짝 늦은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구불구불한 도로 자체도 멋지다고 들었기에 그냥 가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쪽에는 버섯전골 맛집이 있었다. 맛집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버섯전골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하지만 들뜬 마음과는 달리, 아침부터 깔린 짙은 안개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전망대에 간다 한들 뭘 볼 수 있을까 싶었다. 말티재 전망대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안개는 변화가 없어서, 마음속으로는 전망도 단풍도 단념해버렸다. 버섯전골이나 뜨끈하게 먹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돌렸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둥글게 올라가는 전망대를 반쯤 걸어올라 간 순간, 내 입에서 짧은 탄성이 나왔다. 안개는 이미 저 멀리 가 있어 먼 곳만 덮고 있었고 그 앞은 늦지도 않은 적절한 시기의 선명한 단풍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먼 곳의 안개는 경치를 한결 더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전망대를 완전히 오르기도 전에 이미 그 풍경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역시 날씨 때문에 지레짐작하고 실망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하면서 반복해서 다짐했던 것이 '날씨 탓하지 말기'였는데, 이번에도 또 앞서 걱정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결말을, 나는 오는 내내 안개 때문에 망쳤다고 생각하고 왔으니.


기가 막힌 풍경을 보고, 버섯전골까지 맛있게 먹고 울산으로 향했다. 사실 이 여행은 아빠가 울산에서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울산은 대전과 함께 광역시들 중에는 가장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곳으로 여겨지는데, 우리 가족은 두 곳 모두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두 곳 모두 도심에는 예쁜 공원들과 멋진 건축물들이 있고, 주변에는 멋진 산들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풍경이 있어 실제로는 지루할 틈 없다. 날씨처럼, 직접 보기 전에 남 말만 믿어버리는 것도 여행자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울산에 오랜만에 다시 방문하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가장 먼저 신라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묻혔다는 대왕암으로 갔다. 두려움을 참고 엄청난 길이의 출렁다리를 건너, 신비로운 암석들과 노란 꽃들이 핀 해안가를 걸었다.


"봐봐, 내가 더 잘 찍었지?"

사진 찍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아빠는 내가 찍은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핀잔을 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특히 아빠가 내 사진을 찍어줄 때마다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보는 내 얼굴과 내가 보는 내 얼굴은 다른 게 분명하다. 사진을 가지고 한참 투닥거리다, 어쩌다 보니 '엄마가 사진을 제일 못 찍는다'로 이상하게 결론이 났다. 우리는 엄마 귀가 좀 간지러울 거라며 킥킥 웃었다.


대왕암 구경을 마치고는 울산대교 전망대에 올랐다. 낮에 건넌 대왕암의 출렁다리는 어찌나 긴지 이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울산대교와 항구의 풍경이 멋졌지만, 사실 이곳에서 가장 재밌었던 건 VR 체험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이 다짜고짜, "VR 체험 딱 10분 남았는데, 하나 하고 가실래요?"라고 해서 얼떨결에 하게 되었다. 왜인지 건물 1층에는 VR 체험관이 있었는데, 덕분에 우리는 텅 빈 작은 극장에 둘만 들어가 3D 안경을 쓰고 4D 롤러코스터를 탔다.


평행이론이라고 하던가? 몇 년 전 엄마와 둘이서 한 베트남 여행에서 얼떨결에 5D 체험을 했던 게 생각나서 나는 더 크게 웃었다. 5D가 뭐였냐면, 3D 안경을 쓰고 말안장을 타고 총을 들고 화면을 마구 쏘아대는 것이었다. 그때의 어설픈 재미에 비하면 4D 롤러코스터는 꽤나 정교했지만, 지하동굴을 뚫고 대형 곤충이 가로막는 다소 황당한 판타지기도 했다. 아빠와도 비슷한 추억을 만들다니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다.


저녁식사를 한 뒤 밤바다가 보이는 슬도 앞 카페에서 아빠와 차를 한 잔씩 했다. 이렇게 찻집에서 나란히 함께 앉아있을 수 있는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했다. 그래도 엄마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아빠와 이야기하던 중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오전에 상황을 좀 더 봐야겠지만,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내일이면 울산 여행은 모두 끝이 나겠지만, 그래도 주말을 엄마와 함께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내일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부터, 엄마는 괜찮을지, 온갖 안개가 꼈던 여행이었지만 결국에는 말티재처럼 이렇게 걷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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