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도착 첫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단수이였다. 서울-경기도 수준으로 꽤 떨어져 있는 곳이라 가능한 첫날 얼른 다녀오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봤던 대만 음악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아직 한국은 따뜻하다 혹은 서늘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던 4월 말, 대만의 습한 공기는 반갑지 않았다. 나는 워낙 더위와 습기에 쉽게 지치는 사람이라, 땀나는 그 날씨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을 이길 정도로 단수이는 참 예쁘고 산뜻했다. 바다도 있고, 무성한 나무와 풀도 있고, 서양식 벽돌 건물들도 있고. (물론 그전에 사 먹은 소룡포도 한몫했을지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만난 반얀나무에 압도되었다.
늘어진 반얀나무를 처음 봤을 땐 마치 나뭇가지들이 더위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도톰했던 가지가 열기에 녹아, 한 가닥 한 가닥 갈라져 흐물흐물해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머리카락 휘날리듯 다소 무섭기도 했는데, 그 엄청난 규모에 먼저 압도되고 말았다. 단수이 말고 이후에도 반얀나무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단수이 소백궁 앞에서 마주친 반얀나무는 그 규모가 다른 데와 비할 데 없이 컸다.
반얀나무의 가지들이 땅을 향하고 있는 건, 그것들이 뿌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얀나무는 위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도 자란다. 나무기둥에게만 모든 짐을 지게 하지 않고, 가지들도 땅으로 내려와 그 짐을 함께 진다. 존재 자체가 상생인 것이다.
굳건히 잘 서 있는 것 같은 나무들조차, 홀로서기가 어렵기도 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지들이 기꺼이 무게를 나누어 지탱하기도 한다는 걸. 홀로 서 있는 나무조차도 진정으로 홀로 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혼자 버티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도움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고, 모든 건 상생의 방식이다. 주위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 또한, 주는 것만큼이나 오직 마음이 충만한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음으로써 주기도 하고, 주면서 또 받는다.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세상이기에, 우리는 기둥도 되었다가 가지도 되었다가, 다양한 모습으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짐을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모처럼 든든한 순간이었다.
덧 1. 단수이 구경 후엔 용산사 야경을
그래서인지 밤에 야경을 보러 간 용산사에서 엄마는 내가 짝을 찾기를 바란다며 그런 소원을 좀 빌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의 소원을 대신 빌었으나 3주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 아직 효험은 없는 듯하다.
도심에 위치한 용산사의 밤
덧 2. 단수이의 다른 풍경들
단수이는 동남아 분위기 물씬 나는 나무와 풀들이 가득한 곳에 서양식 건물들이 가득하니 오묘한 퓨전의 매력이 느껴졌다.
소백궁은 작은 백악관이라는 이름으로 청나라 때 세무관저로 쓰였다고 하는데, 새하얀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내부에 특별히 볼 건 없었지만 하얀 건물을 둘러싼 정원을 걸으며 잠시 상쾌함을 느꼈다.
진리대학은 캐나다의 선교사가 지은 대만 최초의 서양식 대학교라고 했다. 입구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그 주위에 서 있던 예쁜 벽돌 건물들이 그 연못 안에 잘 담기기도 했다. (연못 안에는 사실 귀여운 거북이들이 여럿 살고 있다.) 이런 캠퍼스라면 매일 공부하러 오고 싶을 것 같다는 (아마 이곳 학생들은 동의하지 못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홍마오청은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관저로 사용한 곳이라는데, 정말 쨍한 붉은 빛깔 건물이 예쁜 곳이었다. 위에서는 단수이 만의 모습도 내려다 보였고 꽤 넓은 풀밭에는 여러 연인들, 가족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옛 침실과 화장실, 심지어 유모차 등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중간중간 동상들이 너무나 사람처럼 서 있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왼쪽부터 소백궁, 진리대학, 홍마오청
덧 3. 대만에서 처음 먹어본 과일들
새로운 곳에 가면 과일을 꼭 사 먹는다. 땀을 많이 흘린 이 날, 과일가게에 들러 호기심에 새로운 과일을 사봤다. 담백하다 못해 채소 같았던 스타프룻과 자바애플. 스타프룻은 단맛 도는 파프리카 같았고 자바애플은 덜 단 대추 같았다. 근데 먹다 보니 중독성이 있다. 특히 수분이 가득해서 더위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