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파도가 아니라 호수의 잔물결이었을지도

대만 여행 5 - 라오메이 해변

by 바다의별

오전에 은하동에 들렀다가, 타이베이 북부로 향했다. 북부에서의 첫 장소는 대만 여행 출발 글에서도 올렸던 라오메이 해변이었다.


묘하게 생긴 바닷가 암석들에 초록 해조류가 잔뜩 낀 4월 말의 라오메이 해변은 봐도 봐도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좋은 순간을 잘 맞춰서 왔다니 새삼 운에 감사했다.


초록빛 암석 위로 계속해서 파도가 철썩였다. 어떤 건 낮고 가볍게, 어떤 건 내 키보다도 높이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날은 습하고 뜨거웠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늘도 없이 서서 속 바라보았다.


하얗게 철썩이는 파도는 어떨 때는 해안으로 들어오고자 문을 두들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떨 때는 해안을 덮치려 드는 위협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오메이의 굳건한 바위는 파도가 쓸고 갈 수 없었다. 아주 느릿느릿 조금씩 깎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망가뜨릴 수 없다.

나는 몇 달 전 해외출장 중에 다리에 깊은 2도 화상을 입고 아직도 치료 중이다. 뜨거운 커피가 내 허벅지를 덮쳤을 때, 예상치도 못한 거대한 파도가 내 온몸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처음에는 멍하기만 했다.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머릿속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도 돌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방지하는 목적에서는 유의미할지 모르나, 이미 벌어진 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다는 멈추지 않고 파도는 계속된다. 계속해서 나를 향해 달려올 파도에 대고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어떤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테지만,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이 없어지진 않는다. 일어날 일들은 어떻게든 일어난다. 막아보려고 노력조차 해보기 전에 이미 파도는 휩쓸고 저 멀리 되돌아나가 있다.

그러니 단단한 모래알, 바위 같은 모래알이 되는 수밖에 없다. 휩쓸리는 모래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파도를 맞이했다 보내주는 그런 모래알이 되어야겠다. 바위까지 되진 못하더라도 바위만큼 단단하고 무거운 모래알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되돌아봤을 때, 그것들이 모두 거센 파도는 아니었음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어떤 건 그저 호수의 잔물결이기도 했음을. 그때 그 순간 속에서는 거대하게 느껴졌을지 몰라도, 그 순간을 보내고 나면 우리의 키는 한 뼘 더 자라니까 말이다.


그래, 정말 그으면 좋겠다. 파도가 물결로 보일만큼 자라기를. 어떤 물살이 와도 꼿꼿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속에는 내가 휩쓸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를.


*어쩌다 보니 글 순서가 바뀌었어요! 실제로는 은하동 > 라오메이 > 예류 순으로 다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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