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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의별 Jul 22. 2024

초연, 그 모습 그대로

뮤지컬 <렌트>

하늘 아래 같은 공연은 없다. 그건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오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아예 연출이나 넘버 자체가 수정되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뮤지컬 작품은 끊임없이 진화하기 때문이다.


오래 사랑받는 공연들의 정보를 찾다 보면, '초연', '재연', '삼연' 등의 단어들이 꼭 따라붙는다. 초연은 말 그대로 맨 처음으로 올리는 공연을 의미하며, 재연은 두 번째, 삼연은 세 번째로 올리는 공연을 뜻한다.


초연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창작뮤지컬 초연은 그전에 어디에서도 공연된 적이 없기 때문이고, 해외 라이선스 뮤지컬의 한국어 초연 역시 현지 정서 및 상황에 맞추어 수정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마찬가지다.(*1) 이후 재연부터는 초연을 기반으로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해진다. 이미 사랑받는 넘버가 있을 것이고, 이미 여러 차례 회자되는 대사와 연출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연과 재연이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캐스팅이 달라지는 것과는 별개로, 뮤지컬은 언제나 수정의 여지가 있다. 이야기의 개연성을 보완하기 위해 넘버가 통째로 사라지거나 반대로 새로운 넘버가 추가되기도 하며, 캐릭터의 비중이나 무대 연출 등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렌트>는 특별한 작품이다. <렌트>는 초연 이후 수정된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제작자 조나단 라슨이 초연 첫 공연 전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배고픈 예술가들, 에이즈에 걸려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 되었지만, 정작 그는 첫 공연조차 보지 못했다.



사실 나는 <렌트>를 보면서 기대에 비해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등장인물도 너무 많았고, 너무 많은 스토리가 얽혀 있어서 다소 어수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몇 차례 수정되었다면 조금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렌트>는 특별했다. 한 번도 제대로 수정될 수 없었던, 처음 만들어진 그대로의 뮤지컬. 오래 전과 지금,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는 뮤지컬.


수정되지 않을 <렌트>의 일부 내용들은 점차 진부한 과거의 것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렌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쉽게 바래지 않을 것 같다. 삶은 힘들고 좌절은 계속될 테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희망을 놓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러니까 <렌트>는 변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언젠가 <렌트>의 수명이 다한다 해도, 라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No day but today


<렌트>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라슨이 살아있다 해도 그는 아마 먼 미래보다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 오늘, 지금에 더 집중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발전하고 진화하는 뮤지컬의 매력을 사랑하는 나지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쯤은 변치 않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는, <렌트>를 이 모습 이대로 계속 사랑할 테니까.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꾸준히 위안이 될 테니까.


52만 5천600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그 오십이만 오천 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말해요 산다는 것을
그것은 사랑 그것은 사랑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느껴봐요 사랑으로

-'Seasons of Love' 중


할 수만 있다면, 조나단 라슨에게 알려주고 싶다. 당신이 보지 못한 당신의 작품은, 여전히 당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대로, 그렇게 매년 52만 5천600분간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뮤지컬 렌트]

▷ 개요 : 1996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 후 같은 해 브로드웨이에서도 초연되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실제 라슨과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반영한 것이나 다름없다. 배고픈 예술가들, 성소수자, 에이즈 환자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초연된 해에 토니상을 휩쓴 것은 물론, 뮤지컬로는 드물게 퓰리처상 또한 수상했다.(*2)

▷ 작곡·작사·극본 : 조나단 라슨(*3)

▷ 국내 제작사 : 신시컴퍼니

▷ 매우 주관적인 추천 넘버 : 'Seasons of Love', 'Out Tonight', 'La Vie Bohème'

▷ 2023년 구연 캐스트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 2023년 11월 11일~2024년 2월 25일)

로저 역 : 장지후, 백형훈

마크 역 : 정원영, 배두훈

미미 역 : 김환희, 이지연

엔젤 역 : 김호영, 조권

콜린 역 : 윤형렬, 임정모

모린 역 : 전나영, 김수연

조앤 역 : 정다희, 배수정

베니 역 : 구준모



1) 국내의 초연은 창작뮤지컬 초연과 라이선스뮤지컬의 한국어 초연으로 나뉜다. 창작 공연 초연은, 어디에서도 공연된 적 없는 작품이 공연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관객들이 아주 제한적인 사전 정보만을 지닌 채로 보게 된다. 라이선스 공연, 즉 해외 작품을 처음으로 한국으로 들여와 한국어로 공연하는 것이라면, 이미 해외에서 공연한 이력이 있으므로 관객들이 어느 정도의 기대치와 예상은 하면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올라온 오리지널 공연과는 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가사가 번안되고 무대 사정이 달라지면서 차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아예 현지 문화에 맞게 일부 수정되는 논레플리카 공연도 있기 때문이다. (거의 동일하게 가져오는 건 레플리카 공연. 하지만 이 역시 가사와 무대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2) <렌트>는 1996년에 수상을 했고, 그 후 2010년이 되어서야 이전 글에서 적었던 <넥스트 투 노멀>이 수상했다.


3) 조나단 라슨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그의 자전적인 뮤지컬 작품 <틱틱붐>에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틱틱붐>은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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