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소경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by 검정고구마

탑승교를 지나 비행기에 오른다. 탑승권을 보고 자리를 확인해 주는 승무원의 얼굴은 피곤해보이지만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먼저 자리에 앉은 이들을 지나며 내 자리를 찾아 간다. 제주도까지의 짧은 비행. 아마 착륙할 때까지 승무원이 아닌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마지막일 것이다. 자리를 찾았다. 비어있는 짐칸에 가방을 넣는다. 꽤 무거운 무게이지만 별일 아닌듯 무심하게 가방을 들어 올린다. 추운 날씨에 입고 온 코트를 고이 접어 가방 옆에 우겨넣었다. 자리에 앉아 벨트를 메고 숨을 돌린다.


승객들이 지나간다. 가족, 부부, 연인, 아이들이 지나간다. 들뜬 얼굴이다. 명절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는지 여행을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시간의 비행을 앞둔 얼굴들은 마냥 밝아 보인다. 곧 하늘을 날아 재회 혹은 휴식으로 향할 그들의 얼굴에 구김살은 없다.


승객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승무원들이 복도를 다니며 짐칸의 문을 닫는다. 동시에 바퀴가 지면을 훑으며 미끄러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서서히 후진 한다. 승무원들이 구명 세트를 가져와 설명을 시작한다. 승객들은 그들의 시범에 귀를 기울이거나, 들뜬 마음을 숨긴 채 심등렁한척 쳐다보거나, 창 밖을 바라본다.


노란 구명조끼를 입은 승무원이 충분히 부풀지 않을 경우 입으로 후후 불어 부풀리는 시범을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좌석 뒤 안내서를 참고하라는 말과 함께 시범이 끝난다. 승무원들이 조끼를 입은 채 승객들의 안전벨트를 체크하기 시작한다. 승무원은 눈으로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한 손으로는 시범 장비를 든 채, 다른 한 손은 짐칸이 열려있는지 꾸욱꾸욱 눌러보며 나를 지나간다.


활주로에 멈춘 비행기의 창 밖으로 햇살이 쏟아져내려온다. 아이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재잘거린다. 벌써 잠을 청하는 아저씨들도 있다. 햇살 속 아줌마들과 아이들의 수다가 귀를 간지럽힌다 .


후진을 멈추고 덜컹거리며 주활주로로 이동하는 비행기. 여행의 시작을 예고하듯 엔진소리와 진동이 한껏 커졌다. 이 시간은 생각보다 길다. 앞좌석 뒷편에 꽂힌 잡지와 면세품 안내서를 훑어 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비행기는 출렁거리며 활주로를 나아가고 있다. 이 좁은 공간의 풍경을 관찰하는 나와,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승무원의 눈이 마주친다. 웃고있는 승무원은 나를, 아니 승객들을 친절히 바라보고 있다. 저 미소 뒤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잊어버린 업무, 빨리 비행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 남자친구와의 다툼, 혹은 저 승객은 왜 나를 묘하게 쳐다보는가에 대한 의문. 생업을 잠시 중단하고 여행을 떠나는 이들과 생업에 종사 중인 이들이 좁디 좁은 공간에 마주 앉아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을 거라는 상상에 묘한 흥분이 느껴진다


우리 비행기는 곧 이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꿀렁이며 기어가던 비행기가 또 다시 멈추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른다. 앞 좌석 사람들은 뒤통수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득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해 뒤를 돌아본다. 뒷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느낌에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굉음이 시작된다. 소리의 데시벨이 높아질 수록 창 밖 풍경도 빠르게 움직인다. 몸이 의자 뒤로 찰싹 붙는다. 어느 순간 중력을 거스르며 붕 떠오른다.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과 동시에 창밖을 바라본다.


서울의 거대했던 건물들이 한낱 콘크리트 쪼가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증명된다. 잠을 청하던 사람들도 슬쩍 눈을 뜨고 창밖을 본다. 커다란 강과 산을 기준으로 다닥다닥 붙은 건물들의 위치를 헤아리며, 저 곳은 서울 어디쯤인지 우리 집은 어디쯤 있을지 헤아려본다.


구름이 만들어 낸 하늘의 경계선이 나타나고 이윽고 파란빛밖에 존재하지 않는 하늘이 펼쳐진다. 아니다. 비행기는 선회 하고 있었다. 땅을 향한 반대편 창밖은 자연의 위엄과 인간의 한계를 더 극명히 보여준다. 땅에 그려놓은 인간의 흔적들과, 태초 그대로 순수한 하늘색의 공간이 묘하게 대조된다.


선회를 마친 비행기가 더욱 고도를 높힌다. 도로와 건물들의 자그마한 자취는 실선이 되었다가 이내 사라진다. 커다란 산등성이의 초록 능선과 파란 강줄기만이 그 곳이 땅임을 이야기한다. 지평선은 하얗다. 지평선 위쪽은 파스텔톤의 푸른 빛에서 하늘색으로, 또 다시 파란색으로, 마치 그라데이션 효과를 준듯 갈수록 짙어진다. 멀리 있는 산능선은 수묵화에서 보듯 아련하게 구름 혹은 안개를 뚫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


좌석벨트 표시등이 꺼지고 이륙을 완료했다는 방송이 나온다. 침을 삼키자 비행기 엔진의 굉음이 한층 커져 귀를 괴롭힌다. 비행기는 어느 덧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은 고도에 오른다. 초록색 올리브 오일을 무질서하게 뿌려놓은 듯, 만과 섬들이 심심한 바다에 다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기들이 울기 시작한다. 이들이 느끼는 중력의 변화는 성인에 비해 더 크고 괴롭다고 한다. 사람들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신경쓰지 않는듯 하지만, 저 울음이 계속되면 이야기는 달라질지 모른다.


승무원들이 음료를 내주기 시작한다. 무엇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 물을 마신다.

창 밖은 고요하다. 파랗다. 평화롭다. 끝없다.


어느 새 잠이 들었나보다.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눈을 뜨고 창 밖을 바라본다. 비행기는 방송 내용이 무색할 만큼 아직 하늘 높은 곳에 있다. 구름 조각들은 비행 길 아래 풍성히 깔려 있고, 이 작은 비행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한적하게 나아가고 있다.


비행기의 창 밖으로 날아가본다. 서서히 밀려나가는 구름들의 크기를 보건데 하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할 것이다.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는 공간. 날개짓을 몇 번 하면, 수십킬로미터를 날아가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만 같다. 끝없이 넓은 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리고 그 곳을 작고 귀여운 비행기 한 마리가 최선을 다해 날아가고 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안개 가득한 느낌의 구름을 뚫고 내려간다. 손을 내밀어 한 줌 뜯으면 솜사탕처럼 찢어질 것 같은 구름들이 창 밖을 지나간다.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의 현실적인 모습과 비현실적으로 가까운 구름의 모습이 오래된 영화의 어설픈 합성 효과를 보는 듯 어색하다. 구름을 지나자 땅의 다채로운 풍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륙할때의 역순으로 바다가 보이고 섬이 보이고 만이 보인다. 바다를 떠다니는 배들이 눈에 들어올만큼 가까워지자 제주도의 땅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서울에 비해 아기자기한 인간의 흔적들이 느껴지던 찰나, 비행기가 고도를 급격히 낮춘다. 몸이 공중에 더 머물고 싶어하는 듯 살짜쿵 떠서 꿀렁이는 느낌을 안겨준다.


바닷가에 자리잡은 공항을 향한다. 창밖 한쪽으로는 아담한 땅의 풍경이, 반대편 창밖으로는바다가 끝없이 펼쳐져있다. 이 분리된 풍경을 온전히 하나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은 파일럿 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활주로를 향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모습이 상상된다.


미니어쳐를 보는듯 했던 땅의 풍경들이, 어느 새 현실적인 크기로 커져 창 밖을 장식한다. 드디어 착륙이다. 바퀴가 땅을 긁는다. 제동이 걸리고 몸이 쏠린다.


그리고 어느새 안정적으로 주행하는 비행기. 성미급한 사람들이 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린다. 주섬주섬 자리의 짐들을 정리하며 핸드폰을 꺼내 비행기 모드를 해제한다.


승무원들은 혹시나 누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는지 눈을 떼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달려와서 제지할 것 같은 엄격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여행을 시작는 승객들처럼, 승무원들도 비행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예의 혹은 체면이라는 가면이 없었다면 모두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을지 모른다.


의자 위로 솟아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창밖을 보며 여행의 시작, 즉 착륙 이후를 상상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몇년 전 내가 그랬듯 상을 치르러 온 이들도 있을 것이고, 걱정을 가득 안고 숨죽인채 이곳을 찾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잔뜩 실어왔을 비행기를 생각하니 그 날개가 무겁게 느껴진다. 창밖 활주로로 누군가를 싣고 왔을 또 누군가를 싣고 떠날 육중한 덩치의 비행기들이 보인다. 드넓은 하늘을 열심히 날아갈 조그마한 비행기들이 보인다. 그 곳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크고 작은 섬세한 감정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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