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고향.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표선면 토산리.
차가 없던 어린 시절에는 제주시에서 시외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와야 했던 촌 동네. 엄마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리면, 맞은 편의 자그마한 슈퍼 두 개가 동네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려 줬다.
왕복 이차로 뒤 숨겨진 작은 마을. 낮고 투박하게 쌓인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한가로이 몰려다니는 동네 개들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동백꽃과 풀들이 흔들린다. 돌담 사이로 하늘 높이 올곧게 솟은 삼나무와 소나무는, 대문 하나 없는 마을의 사람들이 신뢰를 쌓아온 긴 시간을 보여준다. 집 마당과 텃밭까지 빼곡한 귤나무의 설익은 청귤은 수십 년간 자식들과 손자들을 육지로 보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젖줄이었다. 잔잔한 파도처럼 무심하게 흔들리는 대나무들을 지나면 할아버지네 집이 나왔고, 엄마의 손을 뿌리쳐 마당으로 달려가곤 했다. 돌을 쌓고 시멘트로 마감한 거친 돌집 위에는, 가을 하늘 같은 파스텔 톤의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렌터카를 운전해 마을 어귀에 다다랐다. 두 슈퍼 중 하나 남아 있던 표선 슈퍼도 문을 닫았다. 바로 옆에 들어선 신식 건물의 조금 더 큰 마트가 오지 않는 관광객을 유혹한다. 슈퍼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었다. 풀벌레 소리 가득하던 돌담 아래 흙 길은 어디 가고, 아스팔트로 이차선 도로를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다. 대문 없던 몇몇 집은 폐가가 되었고, 그 이웃집들은 시내에서나 볼법한 단독주택이 되었다. 어렸을 적 수백 걸음, 십여 분은 걸었을 것 같은 그 길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큰 은행나무 한 그루와 주인 잃은 귤 밭이 나타나면 할아버지 댁이다. 이제는 폐가가 되어버렸다고 한탄하듯 빛이 바랜 지붕이지만, 여전히 듬직하게 서있는 돌벽은 세월을 잔뜩 머금은 묘한 매력을 조용히 보여준다.
이 집에 대한 기억은 복잡 미묘하다. 철부지 시절 놀던 강아지, 제사와 차례 음식, 마을의 큰 어르신이던 할아버지 덕분에 두둑이 챙기던 세뱃돈. 하지만 이 좋은 기억들 뒤로, 사춘기 무렵 질색했던 짙은 녹색과 갈색의 시골 냄새, 마당을 나와 십 미터는 걸어야 했던 재래식 화장실, 한 겨울이면 얼어붙는 마당의 수돗가, 잔소리만 하시는 할아버지와 까칠하고 딱딱한 할머니의 손까지.
오랜만에 찾은 집의 여닫이 문을 열었다.
쌓여 있는 우편물과 거미줄 뒤로, 작은 소반 하나가 마루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설날이면 소반을 두고 마주 앉은 손님에게 덕담을 건네던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세배가 받기 싫다며 부엌에 숨어 나오지 않던 할머니의 마음도.
퀴퀴한 짙은 돌과 나무집의 내음은, 추운 겨울 등가죽이 얼얼할 정도로 뜨겁게 굴묵을 때어주던 할아버지가 만들어낸 냄새였던 것 같다. 밖으로 나있는 부엌문은 수돗가가 얼어붙으면, 세수할 물을 끓여 현관 앞까지 가져다주시던 허리 굽은 할머니의 길이었다.
주인 잃은 아궁이와 무쇠 솥에서 바람을 입에 넣고 후 불어내 불을 때던 할머니의 숨결이, 어지럽게 널브러진 새까만 목장갑에서 할아버지의 땀이 보이는 것 같다.
세월아...
할아버지 댁을 나와 차를 타고 제주시로 향했다. 봉개로 가는 길, 대천 교차로를 지날 때 저 멀리 소박한 돌담과 할머니의 봉분이 나를 반긴다. 그리고 그 옆 주인을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자리가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