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뭐가 되고 싶었어?
누군가와 어렸을 적 꿈에 대한 대화를 하다가,
슬며시 내 꿈은 예술가, 구체적으로는 영화감독이었음을 얘기하면 황당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때는 그랬다. 괜히 나는 글을 잘 쓰는 것 같았고, 시각적인 예술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심지어음악에도 소질이 있다고 스스로 판정을 내린 나는 이 모든 재능을 발휘하려면 영화 감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근거 없는 믿음을 넘어 예술을 하고 싶다는 꿈을 만들어 낸 것은, 사춘기 시절 흘러넘치던 감수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십년이 흘렀다. 아빠의 반대를 이기지 못해 법학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는) 길을 걸었던 나는 이제 평범한 회사원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요즘도 가끔 그 꿈이 남긴 마음속 흉터를 더듬다가 이제는 안 되겠구나 라는 쓰디쓴 결론을 씹어 삼킨다. 나이, 결혼, 직업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와 함께 그 결론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 가득하던 감수성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해 질 녘 퇴근길 버스에서 느끼는 이유 없는 공허함과 슬픔은 십 대와 이십 대의 나는 느껴보지 못한, 아니 상상도 못 할 뜬금없고 이유 없는 감정이다.
텔레비전 속 십 수년 만에 결합한 옛 아이돌의 이야기에 팬도 아닌 내가 눈물을 주룩 흘리는 이유 모를 향수도 어린 시절 내가 느낄 수 없었던 개연성 없는 감정이다.
봄날 가득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개나리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떨어져 버린 꽃잎에 아쉬움의 눈길이 머물다 푸르러진 숲을 보면 싱그러움에 괜히 힘이 돋는 것 같은 기분도. 힘 없이 걸어가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발걸음에 슬퍼지다가도, 뛰노는 뽀얀 피부의 아이들의 발그레한 볼따구니를 꼬집고 싶은 이 기분도. 모두 결코 어린 시절의 나는 느끼지 못했던 세상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잃어버린 감수성의 지점들도 있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책에서 위안을 얻던 시절, 그대의 인생 시계는 여전히 아침 새벽이라는 구절에 가슴이 뛰어 책장을 덮어버린 감정이 그렇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의 괜한 쑥스러움과 설렘 역시 어느덧 능구렁이가 되어가는 회사원의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할 감정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감수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래 봐야 새로울 것도 달라질 것도 없다는 경험이 그 감정들을 짓눌러버린 결과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 감정들을 단지 내가 꺼내지 않고 있을 뿐 내 가슴 가득 여전히 존재한다면, 나의 감수성의 총합은 예술가를 꿈꾸던 어린 시절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것은 피곤하다. 이놈의 감수성에 얼마나 휘둘리는지 이 문장을 쓰는 짧은 순간에도, 감수성의 총합이 많다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또다시 허탈해진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내 인생 시계는 여전히 오전에 불과할 텐데 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쨌건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인가 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커지는 감수성을 주체할 수 없어, 오십 대쯤이면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아 벌써부터 눈물이 글썽이는. 그리고 그때도 끝내 이루지 못한 그 꿈을 그리워할까 안타까워 가슴이 공허해지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