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가정

‘현대 사회 속의 인간이라면, <불멸의 가정>이라는 정신적 방어기제를 가지기 마련이야.’

이번엔 이 명제를 정리해 보고자 해.


난 사회를 발전시킨 인간의 역사 속에서, ‘불멸의 가정’이라는 정신적인 현상이 포괄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해. 이게 무엇이냐면, 일상 속에서 자신의 필멸을 사실상 망각하고 살아가는 현상을 말하는 거야. 정신없는 삶의 연속 속에서, 언젠가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미친 짓이 돼버리는 거지. 이건 사실상, 사회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가정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현상이야. 뭐, 일단 이런 걸 ‘불멸의 가정’이라고 불러 보자고.


자고 일어난 순간부터 다시 잠들기까지, 완전히 죽음을 망각해 본 적이 있니? 생각보다 많은 날을 그렇게 보내왔을 거야. 죽음이란 것은 불가피하고, 존재가 깨달을 수 있는 확실한 진리 중 하나임에도, 매일 그것을 실감하며 산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졌지.(적어도 안락한 사회 속의 존재에게 말이야.)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인류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다른 존재에게 이런 정신기제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가장 먼저, 모든 존재가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존의 정신’을 이해해야, ‘불멸의 가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생존의 정신’이란, 존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지는, 모든 종류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의미해. 언제나 생존 자체에 몰두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그것에 집중하는 거지. 매 순간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삶을 빼앗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거지.


물론 이걸 인지적으로 진행하는 건 아니지만, 본능의 형태로, 사실상 그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거야. 내가 약할 때 조금이라도 더 치열하게 움직여야 하고, 무언가를 섭취할 때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해야 하며, 독립을 향해 목숨을 걸어 나아가고, 자기복제를 위해 한정된 시간 속에 가장 경쟁적으로 임하고, 운동 능력이 부족한 자식을 위해 유의미한 육아 전략을 구사해야 하지.


어쩌면 ‘생존의 정신’이란, 모든 형태의 처절한 노력이야. 이런 정신을 유지할 수 없으면, 자연스레 다음 순간에 죽을 확률이 올라가기에, 자연 속의 삶에서 가장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무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어떤 현상이든 예외가 있기 마련이라, 이런 정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도 존재해. 특히 해당 생태계가 섬 구조일 때, 꽤나 빈번하게 발생하지. 대표적으로 ‘도도새’의 예가 있어. 포유류가 없는 섬에서 진화한 도도새는, 천적이 없고 먹이가 풍부해서, 오래 동안 ‘생존의 정신’을 잊어버린 거 같아. 처음 인류가 섬에 들어왔을 때, 녀석들은 아무 의심 없이 인간을 졸졸 따라왔고, 항해자들에게 쉬운 단백질이 되었지.


난 개체가 장기간 생존의 처절함을 강요받지 않을 때, 이 ‘불멸의 가정’이 뇌의 어느 작용으로 자연스레 발생한다고 생각해. ‘생존의 정신’의 빈자리를 메꿔 줄, 대체재로써 말이야. 그 자체로 해당 개체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형식이겠지.


충분히 예상했듯, 가장 흔하게 이 현상을 접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야. 현대 사회의 인간에게 생존의 법칙이 강요되는 환경이 자주 배제되기 때문이지. 간단하게 얘기해서, 우린 각 개체에게 자연에서 필요한 정신 대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어. 이런 ‘정신의 대체’가 일어난 바탕에는, ‘잉여 생산’을 필두로 하는, 몇 개의 사회경제적 혁명이 자리 잡고 있지. 그것은 문명이 발생한 순간부터,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현상이었고, 기하급수적으로 자신의 변화 속도를 갱신하는 역사와 연관되어 있어.


‘불멸의 가정’은 인간에게 거의 모든 경우에서 ‘생존’을 최소한 보장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야. 실제로 자신이 불멸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상태가 아니어도, ‘내일의 나는 당연히 살아있다’는 명제를 확신하지. 이건 오랜 기간 ‘생존의 과제’가 개체에게 강요되지 않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야. 우린 신생아에게 다른 생명처럼 독립된 생존전략을 강요하지 않지. 그저 어떤 것이든 결여되어 있다면, 신호를 보내는 체계를 바랄 뿐이야. 그래도 여기까진 유아의 뇌가 너무나 커지면서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지.


하지만 우린, 인위적으로 개체의 성장에서 ‘자연의 위협’을 배제하는 길을 택했어. 매 끼니와 집을 제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품을 대신 구매해 주지. 그렇게 만든, 에너지의 빈자리를 ‘교육’이라는 형태로 대체하는 방식이야.


‘교육’은 생각보다 포괄적인 지혜를 습득하도록 설계되었어. 단순히 여러 과목의 지식뿐만 아니라, ‘자연’이 어떤 곳인지도 알려주고, 어떤 걸 조심해야 위험하지 않은지, 어떻게 사회성을 갖춰야 하는지 등. 정말 여러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이지.


인간의 ‘교육’이 다른 종의 그것과 구별되는 이유는, 그 목적이 지혜를 다음 세대로 축적, 발전시키는 것에 있어. 고로, ‘교육’도 인위적으로 정제된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지.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어린 개체의 환경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가진다는 데에 있어. 태어나자마자 의존적이었던 개체의 운명은, 물리적인 활동성을 확보해도 전혀 벗어날 수 없게 되었어. ‘교육’이라는 시스템 속에, ‘자연’을 그저 지식의 형태로 남고, 개체에게 사회 속에서의 생존을 빌미로, 특정한 형태의 ‘능력’을 요구하는 거야.


난 이 구조가 개체에게 ‘불멸의 가정’이 발생, 발전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고 생각해. 단순히 물리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을 착각하는 걸 넘어, 사회라는 시스템과 자연 사이에 확실한 장벽을 보여주고, 인간에게서 ‘동물’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지우는, 거대한 실험이지.


이쯤에서 조금 더 이 ‘불멸의 가정’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겠어. 만약 당신에게 ‘전쟁’ 상태가 조금도 감이 오지 않는다면, ‘불멸의 가정’이 이미 당신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는 거야. 당신에게 현대 국가와 정치사회학에 대한 일말의 지식도 요구하지 않지만, 내일도 한국어를 쓰면서 직장에 다니고, 친구와 수다를 떨며, 휴대폰으로 휴식하다 잠드는 등, 모든 일상을 보장하는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정신이지.


뉴스에서 정말 심각한 비상사태를 언급하지 않는 이상, 당신은 자신의 일상이 어떤 식으로 보장될지, 그에 최소한 어떤 노력을 지불해야 하는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 이 심리는 인간의 ‘보수성’ 형성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오늘처럼 내일을 확신하는 공식을 가지고 있지. 반대로 얘기하면, 그런 확신에 조금이라도 불신이 발생하면, 우리는 건강한 정신(어제와 같은)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는 거야. 한 마디로, 미치지 않기 위해 불멸을 가정한다는 거지.


여전히 만족스러운 설명은 아닐 거 같아. 좀 더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우린 모두가 ‘온실의 화초’가 되는 실험 중이란 거야. 물론 자식을 과하게 보호하는 것과 거리가 있지만, 적어도 ‘난 죽지 않는다.’는 착각을 만들어줄 만큼 강력한 현상이야. 개개인이 ‘난 절대 보호받을 거’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실상 그런 불멸에 익숙한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현상을 지적해보고 싶어.


반려동물의 예시를 드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지. 반려동물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가정’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야. 그들은 인간과의 생활에서 ‘야생성’을 서서히 상실하게 돼. 그 과정에서 인간처럼, 빈 곳을 ‘불멸의 가정’으로 채우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지.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직접적으로 ‘죽음’을 연상하기 힘들어진다는 거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간의 손에 관리된 녀석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녀석들도 생존의 위협이 닿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지면, ‘불멸의 가정’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지. 고양이는 인간이 자신을 숭배한다는 믿음으로, 강아지는 인간이 신적인 영역을 펼쳐서 안전한 생활이 구성된다는 수식으로, 이 가정을 굳건히 받아들이게 돼.


어찌 보면 이 ‘불멸의 가정’은, 인간이 ‘안락한’ 생활권을 구성하면서 탄생한 개념이야. 앞에서 얘기했듯, 이 현상은 인간의 보수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원시사회를 생각하면, 우두머리는 병이나 노화로 자신의 권력을 상실할까 두려웠을 거야. 어쩌면 그들에겐, 불멸의 증거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특권층과 대중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행위는, 그런 증거를 쉽게 암시하는 장치가 되었을 거야. 대부분의 봉건사회가 봉건지주의 성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그 직접적 영향력을 성벽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건, 딱히 우연이 아닌 거지.


내가 ‘불멸의 가정’을 인지한 계기를 생각하면, 그 가정이 어떤 곳에서 발생하는 쓰레기인지 더 잘 알 수 있어. 몇 번 주변인의 죽음을 경험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지. 난 30 평생을 나태 속에 산 사람이라, 금세 계획 없이 뒹굴거리고 있더라고. 이미 이렇게 약아빠진 행동거지로만 살아갈 수 있는, 못난 놈인 거야.


하지만 내가 단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면, 절대 자신만의 ‘의식’을 쉰 법이 없다는 거야. 내가 아무리 남들보다 비겁하고 못난 생각 속에 숨더라도, 내가 여전히 ‘나’라는 것을 언제나 확신하고 싶었어. 시답잖은 게임 때문에 며칠을 낭비하고, 수면 사이클을 몇 개월이나 망가뜨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몸무게를 불리는 생활을 유지해도, 스스로의 ‘사고’만은 놓지 않으려고 했지.(물론 그 ‘사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그런 생활이 유지될 일 없을 거지만, 내게 이건 좀 다른 영역이야. ^^) 그래서 난 ‘죽음’을 간접적으로 접한 후, ‘불멸의 가정’을 만날 수 있었어. 내 ‘사고’가 드디어, ‘나태함’에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순간이지.


처음으로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나태’가 근본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물론 이전에도 이런 생활을 수치스럽게 느끼곤 했지만, 이건 문제가 좀 달랐지. 난 뭔데 이렇게 대책 없이 살고 있지?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죽음’이 뭔지 정말로 알고 있다면, 이런 안락함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건, 미친 짓 아닌가?


이 가정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회체계에 구체적인 불만이 적을수록, 객관적으로 인지하기 어렵다는 점이야. 만약 당신이 지금의 생활에 어느 의미에서든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면, 자신의 존재에 불멸을 빗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들어. 오히려 누구도 ‘모두 언젠가 죽기 마련’이라는 전제에 너무나 당연하다고 동의하고 있지.


우린 점점, 진짜 ‘죽음’에서 멀어지고 있어. 교묘하게 구성된, 저렴한 안락에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미래를 논하려고 하고 있지. 적어도 난, 그런 놈이었어. 지금도 그런 생활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생각해 보길 바라.


또 이상하고 싱겁게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내가 처음 ‘불멸의 가정’을 생각해 냈을 때 썼던 글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도 좋겠어. 슬슬 다음 헛소리를 써야 하거든.



그건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의문이었어. 후회고, 회환이었지. 난 왜 모두의 불멸을 가정하고 있었던 걸까? 할머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왜 연결되지 않았던 걸까? 할머니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실존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갑자기 심각해지면서, ‘그래 우리는 다 언젠가 죽을 몸이지.’라고 잠깐 중얼거리는 거와 같은 정도로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그냥 넘어가 버렸고, 이 오만한 모순 때문에, 가볍게 할머니의 불멸을 가정해 버린 거야. 무서워, 이렇게나 무거운 죽음을 난, 알아채지도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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