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갖고싶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혼잣말이었다. 아무 의미도 별 뜻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응?"
잘라낸 스테이크 한 조각을 내 접시에 올려주며 그는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서 또 뭘 봤어?"
짓궂게 웃는 미소에 싫은 기색은 없다. 언제나그렇듯, 둘째 딸래미를 바라보는 것같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뭐 쇼핑 중독인 줄 아나."
새침한 척을 해본다. 이렇게 입술을 비죽이면 보통 그는 못이기는 척 내 욕심을 따라준다. 작게는 더운 날 망고빙수부터, 크게는 새로 나온 지갑과 가방까지. 내 말에는 아무 깊이도 없었는데 그가 되려 내 혼잣말의 의도를 캐묻는다.
"이번엔 어떤 거야."
"아니라니까."
그가 잘라준 스테이크를 잘근 씹었다. 입안에 퍼지는 육즙은 자연 그 자체의 피맛이었다. 날 것의 내음을 맛있다고 느끼는 내가 순간, 아주 어리거나 아주 원시적이라고 느껴졌다. 하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백화점 다녀왔어?"
백화점?
학교만큼 자주가는 곳이지만 최근에 딱히 눈에 들어오는 아이템이 있던 건 아니었다. 구찌에서 본 빨간 그 가방도 얼마전 오빠가 곱게 포장해서 가져다 주었고 맥에서 잠깐 발라본 주황빛 립글로즈는 그 자리에서 까만 리본이 묶여 파우치 속으로 들어왔었다. 나는 정말 필요한 게 없다.
"그런 거 아니야 오빠. 신경써줘서 고마워."
"왠일로 예쁜말?"
"항상 예쁘지, 아니야?"
어쩔 줄 모르겠다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붉게 달아올랐다.
"다 먹었어?"
아직 접시 위에는 고기가 절반 정도 남아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자."
달뜬 표정으로 내민 그의 손을 잡는데 - 문득 며칠 전 동아리방에서 본 손바닥이 겹친다. 햇살이 한가득 비추인 손, 그 위에 올려진 볼펜 한 자루.
"받아."
투명하다고 해야할까, 퉁명스럽다고 해야할까. 보통 나에게 말을 거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긴장하거나 흥분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그 목소리는 독특했다.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팔 떨어지겄어."
어색한 사투리. 현우는 서울 토박이라고 했었는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하긴 스터디 자기 소개 때 아주 잠깐 들은 거니까 - 그마저도 오빠와 저녁 약속 잡느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 기억이?
"가자"
눈 앞에서 오빠는 손을 내밀고 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올렸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자꾸만, 그 동아리방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싶다.
"분홍색이야?"
엉거주춤 펜을 집어든 나에게 현우는 물었다. 황당한 질문이었지만, 질문은 질문이었다.
"아니. 로즈골드."
나는 펜을 돌리며 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눈동자를.
한 낮의 햇살 아래서 그 색이 더 똑똑히 보였다. 연한 갈색의, 아주 큰 동공.
고양이 같은 눈에 빨려들어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
[ 후드득 ]
"깜짝이야."
비둘기였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다가 창문을 치고 날아오르는 참이었다.
"괜찮아?"
"놀랐어."
"비둘기에?"
"왜 저기있고 난리래"
"새가슴이네."
"뭐!?"
"뭐? 아.... 왜?"
발끈해서 얼굴이 빨개진 나에게 현우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물었다. 뭐 못 할 말이라도 했느냐는 태도가 더 말문을 막히게 했다.
"얼굴은 왜 빨개져?"
"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되받아 칠 말을 찾는데, 어떤 문장도 떠오르질 않았다. 남자와 말장난을 주고 받은 일이 있어야 뭔 말이라도 하지. 보통은 그들의 짧은 말에 내가 건성 건성 대꾸를 하거나, 내 입에서 오만원권 지폐라도 떨어지는마냥 경청하는 그들을 바라보거나 둘 중의 하나였으니. 나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 갈래."
"왜 벌써가."
"......."
"좀 더 있다 가."
"그 말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거야?"
"뭔 말?"
나는 얼굴이 괜히 새빨개졌다.
"좀 더 있다가라는 거?"
대답없는 나를 가만히 보던 현우는 웃음보를 터뜨린다. 오빠와는 확연히 다른 웃음이다. 세상 때가 하나도 묻지않은, 고민이라는 것에 스스로를 가둬본 적이 없는.
"커피 마실래?"
그 때. 그 공간에서 나는 분명 심장이 두근,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현우는 내가 지금껏 만나왔던 남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평범하고, 지금 눈 앞에서 스위트플로어인 24층을 누르고 있는 오빠만큼 잘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런데 왜 지금 그놈의 커피마실래,가 귓가에 맴도는걸까?
"지은아."
"응?"
"괜찮아?"
"... 오빠."
"응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아."
"나 열 나는 것 같아. 집에 갈래."
"그래?"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는 오빠를 보면서 내 생각은 자꾸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나는 그 때 분명 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었다. 저 엉뚱한 사고회로를 파헤치고 도무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이 사람에게 나라는 나무를 박아넣고 싶었다. 저 흐릿한 눈이 나를 볼 때 환희와 반가움으로 빛난다면 어떻게 될까, 저 밍숭맹숭한 말투가 설렘으로 부드러워진다면 어떨까, 선홍빛 호기심이 마구마구 일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
"갈게."
어울리지 않게 당찬 목소리가 나왔다. 그 때 나는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나답지 않게.
".... 지은아!"
"내가 연락할게."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복도에 멍하니 서있는 오빠에게 손을 흔들면서 나는 한동안 연락하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을 한다.
갖고 싶어.
이제 그 혼잣말의 목적어를 알았다. 나는 호텔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안녕"
"응? 무슨 일?"
"어디야?"
"나? 학교. 왜?"
"커피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