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느 겨울, 떠올리는

by 윤성씨

감성들이 말라 비틀어지는 밤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의 눈에 당신을 담는 것, 그 하나로 충분히 열 두어 방울 정도 울 수 있었던 예민한 계절도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요.


그 새벽에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르셨겠지만. 따뜻한 손으로 나를 깨워주기를 바라면서 차가운 밤공기를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어요.

왜 당신이 그 날 찾아주시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요며칠 웃어주셨기 때문일까요, 내 손을 잡고 나의 작은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던 몇 번의 배웅 때문이었을까요. 점심을 먹을 때 내 밥숟가락에 깻잎 한 조각을 찢어 올려주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가 말없이 멈춰선 쇼윈도를 기억해두셨다가 수줍게 사다주신 작은 노트 때문인지도. 아무튼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많았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벽에 당신이 문을 두드리며

'보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상황을 기대한다는 것은

전 - 혀 개연성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망상이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누워 있었니다.

저녁에 당신과 있었던 일을 드문드문 꺼내 먹으며.


당신은 우리가 자주 걷던 그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제 손을 잡으셨지요. 가로등 불빛이 제 빨개진 얼굴을 감춰주어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릅니다. 이유를 묻는 제 눈동자에 비친 당신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지금 떠올려도 참 사랑스럽다- 고 하면 너무 주제넘은 표현일까요.

한참을 망설이다 쭈뼛하게 발음하신 두 글자도요.


'힘 내.'


그보다 적당한 말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참 힘든 날이었고,

그래서 평소에는 낼 수 없던 용기를 내어

늘 친절하셨던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으니까.


'유자차 마실래요?'


따뜻한 유자차를 당신과 함께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좀 마음이 풀릴 것 같았거든요. 기꺼이 포근한 시간을 내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백마디 말보다 달큰한 경청이 필요했던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한시간 반을 꼬박 제 하소연만 들어주셨죠. 지루하셨을 철부지의 넋두리를 한 방울도 빠짐없이 다 마셔주신 덕분에

'배는 안고파?' 라고 물으실 때 쯤의 저는 말끔히 나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새벽, 저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힘 내, 라고 말해주신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을 뻔, 하다가 이마에서 그치고 만 것이

못내 아쉬웠던 거지요. 그냥 용기를 내어 목에 팔을 둘렀어야 했을까, 생각하다가, 망측하다고 돌아 눕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 지 모릅니다. 파란 새벽이 지날 때까지

나는 오실 리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까무룩히 잠이 들었어요.


아침 신문을 챙기러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놓여져있던 작은 화분이 떠오릅니다. 핑크빛 제라늄 사이로 자그마하게 적혀있던 쪽지도요. 당신은 그 새벽 무슨 마음으로 나의 집 앞을 서성이셨을까요.


'보고싶어서 왔다가,

정신차리고 돌아가.

많이 좋아해'


화끈 달아올랐던 볼과 그 날 내 작은 심장을 빨갛게 채웠던 사랑의 감정. 아, 그렇게 살뜰하게 사랑해주었던 나의 당신.

지금도 누군가에게 넉넉한 사랑을 부어주고 있을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그 때의 반의, 반도 못되는 팍팍한 감성으로 참 순진무구했던 나. 그리고 못지않게 순수했던 당신을 떠올리니 - 이런 저런 세월에 훌쩍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 속상합니다. 겨울밤의 바람이 건조한 탓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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