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들이 말라 비틀어지는 밤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의 눈에 당신을 담는 것, 그 하나로 충분히 열 두어 방울 정도 울 수 있었던 예민한 계절도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요.
그 새벽에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르셨겠지만. 따뜻한 손으로 나를 깨워주기를 바라면서 차가운 밤공기를 오감으로 느끼고 있었어요.
왜 당신이 그 날 찾아주시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요며칠 웃어주셨기 때문일까요, 내 손을 잡고 나의 작은 방 앞까지 데려다주었던 몇 번의 배웅 때문이었을까요. 점심을 먹을 때 내 밥숟가락에 깻잎 한 조각을 찢어 올려주셨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내가 말없이 멈춰선 쇼윈도를 기억해두셨다가 수줍게 사다주신 작은 노트 때문인지도. 아무튼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사건들이 꽤 많았었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벽에 당신이 문을 두드리며
'보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상황을 기대한다는 것은
전 - 혀 개연성도 없고 얼토당토않은 망상이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누워 있었니다.
저녁에 당신과 있었던 일을 드문드문 꺼내 먹으며.
당신은 우리가 자주 걷던 그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제 손을 잡으셨지요. 가로등 불빛이 제 빨개진 얼굴을 감춰주어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릅니다. 이유를 묻는 제 눈동자에 비친 당신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지금 떠올려도 참 사랑스럽다- 고 하면 너무 주제넘은 표현일까요.
한참을 망설이다 쭈뼛하게 발음하신 두 글자도요.
'힘 내.'
그보다 적당한 말은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참 힘든 날이었고,
그래서 평소에는 낼 수 없던 용기를 내어
늘 친절하셨던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으니까.
'유자차 마실래요?'
따뜻한 유자차를 당신과 함께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좀 마음이 풀릴 것 같았거든요. 기꺼이 포근한 시간을 내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백마디 말보다 달큰한 경청이 필요했던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한시간 반을 꼬박 제 하소연만 들어주셨죠. 지루하셨을 철부지의 넋두리를 한 방울도 빠짐없이 다 마셔주신 덕분에
'배는 안고파?' 라고 물으실 때 쯤의 저는 말끔히 나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새벽, 저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힘 내, 라고 말해주신 입술이
내 입술에 닿을 뻔, 하다가 이마에서 그치고 만 것이
못내 아쉬웠던 거지요. 그냥 용기를 내어 목에 팔을 둘렀어야 했을까, 생각하다가, 망측하다고 돌아 눕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 지 모릅니다. 파란 새벽이 지날 때까지
나는 오실 리 없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까무룩히 잠이 들었어요.
아침 신문을 챙기러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문 앞에 놓여져있던 작은 화분이 떠오릅니다. 핑크빛 제라늄 사이로 자그마하게 적혀있던 쪽지도요. 당신은 그 새벽 무슨 마음으로 나의 집 앞을 서성이셨을까요.
'보고싶어서 왔다가,
정신차리고 돌아가.
많이 좋아해'
화끈 달아올랐던 볼과 그 날 내 작은 심장을 빨갛게 채웠던 사랑의 감정. 아, 그렇게 살뜰하게 사랑해주었던 나의 당신.
지금도 누군가에게 넉넉한 사랑을 부어주고 있을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그 때의 반의, 반도 못되는 팍팍한 감성으로 참 순진무구했던 나. 그리고 못지않게 순수했던 당신을 떠올리니 - 이런 저런 세월에 훌쩍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 속상합니다. 겨울밤의 바람이 건조한 탓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