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우리는 낯익은 나무 앞에서 만났다. 네 명이 팔을 쭈욱 뻗어도 손 끝이 맞닿을까 말까 한 오래되고 큼직한 나무 둘레를 따라 벤치가 놓여있다. 그 위에 앉아 초콜릿 우유를 마시던 너는 찬찬히 나를 뜯어본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누르며 너에게 한껏 웃어 보였다. 사랑스럽다, 언제나처럼.
"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너무 오랜만이라서."
너는 약간의 동경과 두려움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벤치 옆에 걸터앉는다. 삼선 슬리퍼, 하얀 발목 양말 옆에 나의 하늘빛 단화가 가지런히 놓인다.
"요즘 바빴지?"
"네… 그래도 마지막 중간고사 끝나서 다행이에요. 하, 그놈의 영어 때문에 진짜 고생을 고생을.."
이내 붉어지는 눈시울. 영어 선생님이 주관식 하나를 틀리게 채점해서 점수가 간당간당했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래도 가정 선생님이 잘 말해줘서 다행이지."
"맞아요, 언니 기억하네요."
이어지는 한숨. 그래도 덕분에 수행평가 점수는 잘 마무리되었고 이제 수능 준비에만 집중하면 된다. 수시 결과가 남긴 했지만, 거기에 연연하기에는 시간이 얼마 없다.
"오늘이 발표지?"
"네.. 근데 괜찮아요,
안돼도."
떨어져도, 라는 말은 방금 너의 목구멍에서 꿀꺽 삼켜져 내려갔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지나가는 불안함. 혹시 유진이나 승민이가 덜컥 수시가 되어 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다. 워낙 잘하는 친구들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붙어도 잘 도와줄 거라는 걸 알지만 – 자존심에 상처가 날 것은 분명하다. 너는 애써 그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어차피 잘 될 거야."
"언니, 정말로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안도와 기쁨이 가득 찬 미소를 짓는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는 것이 느껴진다. 너의 그 단순한 행복이 나는 얼마나 부러운지. 편안한 얼굴을 찬찬히 보다가 – 쓸 데 없는 말이 나왔다.
"살이 더 빠졌네."
헐렁해진 남색 폴라 티의 소매가 유독 펄럭인다. 물감이 가득 묻은 앞치마, 4B 연필로 틀어 올린 길 다란 머리카락. 잘 챙겨 먹어야지, 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만둔다. 너무 말랐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보건실에서 이제 그만 좀 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속이 상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침마다 병적으로 몸무게를 재는 것이 이상한 것은 당연하다. 너는 혹시 저녁마다 약 먹듯이 토를 하는 것이 들킨 걸까 싶어 그 후로 보건실 체중계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칼로리 계산과 토악질이 멈춘 건 아니지만. 안쓰러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오랜만에 나타난 대화 상대에 신이 나서 말한다.
"언니, 어제는 일부러 1학년 때 복도를 걸었어요. 바로 옆에 나무가 흔들리잖아요, 솨 – 솨 – 그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갈 때 걸려 있는 그 커다란 그림. 그건 누가 그린 걸까, 근데 사실 나는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요즘 색연필로 삭 삭 마무리할 때 재미있기는 한데 – 선생님들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건 확실히 아니에요."
내가 듣고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너는 그냥 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에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리고 나는 구관에서 신관으로 넘어가는 그 복도가 너무 좋아요. 높고, 하늘이 정면으로 보여. 어제는 나 가만히 서서 구름을 봤단 말이에요 언니. 근데 너~무 파란 거예요. 세상에 그래서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그래서 수민이가 이상하다고 진짜 또라이라고, 그랬는데. 나 이상해요?"
"아니, 전혀. "
"아, 나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언니. 이상하죠. 나 이렇게 그냥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바다 내음이 실려오는 한강을 보면서 담배 피우는 새벽이 좋고. 어른이 되면 뭐가 있을까, 상상하는 잠깐들이 좋고. 노을을 보면서 채점하는 옥상이 좋아요. "
들떠서 말하던 너는 좋아요, 를 마치기가 무섭게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하늘이 떠오른다. 알고 있다, 너는 너의 행복이 두려운 것이다, 정확히는 행복이라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와 반드시 뒤따를 절망이.
"다 끝나버릴까 봐 너무 무서워요, 언니."
잔뜩 겁에 질린 너를 보며 이번에는 내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끝나지 않아.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거! 나는 그게 너무 싫어요 언니. 평범하게, 평범하게 라니!"
너는 기를 쓰고 고개를 젓는다. 너의 머릿속에는 투데이 1,000쯤은 훌쩍 넘는 중학교 동창의 미니 홈피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그에 비해 핸드폰도 정지한 채 세상과 등을 진 지금이 초라하기 짝이 없다는 자괴감이 들어차는 것이다. 파도처럼, 그 끝없는 불안과 자괴는 너의 세계를 넘실거린다.
"선생님들이, 엄마도. 일단 대학에 가면 된대요. 그리고 홍대, 언니, 생각만 해도 떨리지 않아요? 홍대만 가면 내가 생각하는 그 세상들 다, 엄청 가까워지는 거잖아요."
너의 기대에는 보상심리와 절박함, 두려움과 압박감이 촘촘히 뒤섞여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왜, 는 없다. 어떻게만 가득한 것이다. 도리어 그 단순함이 너를 편안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불안해요. 언어는 괜찮은데 외국어가 자꾸. 문법을 꼭 하나씩 틀려요 미치겠네. "
"괜찮아.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하면 돼."
"언니는 맨날 잘 된다, 좋다, 괜찮다는 말만 해."
불쑥 몸을 내 쪽으로 돌린 너는 이제 속 시원히 털어놓아 보라는 듯 눈을 반짝인다.
"언니, 그래서 지금, 어때요?"
너는 내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유명한 사람인 지 궁금해한다. 지나가기만 해도 오, 감탄이 나오는 차를 타고, 멋진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면서 여유롭고 뭔가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삶이 듣고 싶은 것이다.
"행복해. 잘 지내고 있어."
"행복하다..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언니, 그래요, 그럼 세상을 바꾸고 있나요?"
"내가 움직이는 만큼, 아주 조금은. 근데 굳이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더라."
"왜요?"
"왜 세상을 바꿔야 하는데?"
나는 처음으로 너에게 질문을 했다.
"그야.."
그러면 좋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래도 한 번 태어난 인생에, 와 같은 말들이 빙빙 돌다가 벤치 아래로 떨어졌다. 손가락 마디를 깍지 끼고 힘을 주었다가, 푼다.
"그래야만 하는 건 없어. "
"무슨 말이에요?"
"어떤 것으로 너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불경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소리냐고 말하려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한다. 그래, 이 말은 지금 너의 세계를 온전히 다 흔드는 말이다.
"기말고사 점수, 실기 평가, 영어 듣기, 근현대사 연대표를 외우는 것과 너의 존재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짓은 다 뭐예요? "
이제 너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뭐가 되는데요, 내가 이 오만 노력을 한 끝이 고작..!"
고작, 이라고 말하는 너의 말에 독기가 서려있다. 그 서늘함은 누구라도 벨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롭다. 너무 잘 아는 말, 상처의 말. 나는 여러 번도 그 칼날에 베이고, 찢기고, 충분히 아팠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아마도 내 눈은 그러지 않아도 돼, 라는 애틋함,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겠지, 라는 어느 정도의 공감, 그리고 또 약간의 눈물이 뒤섞여 복잡한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너는 더, 버틸 수 없다. 너 스스로가 너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만큼 잔인하고 불안한 말이 또 없기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썼어. 갈게요."
한참 고개를 흔들던 너는 벤치에서 떨어진 초콜릿 우유를 쾅, 밟아 버리고 후문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뛰어간다. 찬바람이 가득한 뒷모습을, 나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하지만 오늘은 – 왜인지 나도 모르게 꼭 같은 보폭으로 걸어가 너의 팔을 잡았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팔을 잡은 내 손가락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노려본다. 송곳같이 날카로운 단호함에 다시 움츠러들 것만 같다. 하지만 애써 뻗은 손을 거둘 수 없어서, 지금의 결론을 뱉고 말았다.
"그 노력의 끝은 너가 되는 거야. 어떤 무엇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체로 충분한 너."
나는 얼어버린 열아홉의 나를 안았다.
가냘픈 어깨가 흔들린다.
사랑하는, 충분히 그 시기를 힘들어해 주었던,
고마운 그 날의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