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후 돌아와서도 지금과 같은 기분이라면 이제 그만 사는 것이 좋겠다.
JFK로 떠나는 대한항공 표를 예약하는 나의 다짐은 처연했다. 옷차림과 구두는 패션위크를 앞둔 5번가의 포스터처럼 화사했지만,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속내는 공허했다. 여기에서마저 내 삶을 발견하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두려움과 어차피 마지막이라면 아낌없이 즐겁자는 위험한 스릴로 가득 차 있던 첫날밤. 나는 처음 만난 러시아 여자애와 헬스키 친의 어느 펍에 앉아 있었다. 여자애는 같은 학교 남자애를 불러도 되겠냐고 했다. 그래, 안 될 건 뭐니.
셋이서 슈퍼볼 경기를 보며 블루문을 홀짝이다가 - 나는 별안간 허전해졌다. 원대한 어떤 것을 찾아 13시간을 날아 도착한 땅에서 고작 선택한 것이 홍대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부어라 마시는 블루문이라니.
얼떨떨해 있는 나를 배경으로 슈퍼볼 이야기를 한참 하던 그들은 나의 생각을 말해보라고 했다.
내 생각? 어떤?
뭐든지. 그냥 생각하는 것 말이야.
난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아.
사람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어.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 터졌다.
그래, 사람은 한순간도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없지. 나는 어느 누구보다 생각하기를 잘하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나는, 영감을 찾아 떠나온 곳에서도 멍 때리고 있는 멍청이라고 - 와 비슷한 말을 하면서 울어대는 내가 얼마나 민망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지금까지의 그 어떤 말보다 귀담아 들었고, 슈퍼볼의 광고와 환호성쯤은 음소거시키고도 남을 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했다.
좋은 생각을 해보자, 너는 특별하고,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와 같은 말들.
헬스 키친을 나와서 남자애는 여행을 시작할 용기가 있냐고 물었다. 여자애는 피곤하다고 택시에 한쪽 다리를 걸친 채 나를 쳐다봤다.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서울에서 몇 백번을 갈망해도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던 말 앞에서 나는 머뭇거렸다.
내 손에 움켜쥔 나의 자유를 어떻게 뿌려댈 것인가의 갈림길.
좋아.
러시아 여자애는 행운의 여신처럼 웃어 보였고, 남자애는 한쪽 손을 내밀었다.
두 대의 택시가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하나는 어퍼 웨스트로, 다른 하나는 로우 맨해튼으로. 허드슨 강가를 따라 달리는 택시 안에서 - 스물셋의 생일 파티를 떠올린다. 그때 나와 함께했던 그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택시가 멈춰 선 곳은 내가 처음 와보는 어둑하고 한적한 길이었다. 아무 정보도 없는 소설의 시작처럼 생경한 그곳에서 우리 둘은 치킨 앤 와플을 먹었고, 암호를 대야 들어갈 수 있는 히든 바를 찾아가 칵테일을 마셨고, 기가 막힌 샹들리에가 있는 술집에 들어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합류했고, 불투명한 미래와 잡히지 않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벽 네 시가 넘어서 호텔로 돌아온 나는 기분이 좋았다. 몇 시간 전까지 울고 있던 내가 참, 바보같이 느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바로 맞은편 호텔에 묵고 있던
그 아이와 구겐하임 뮤지엄을 걷고, NYU 공원 벤치에 앉았다가, 또 이름 모를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 삶이 얼마나 엉망이고 보잘것없는 지를 한탄했고 너는 그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지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너는 특별해. 내가 만난 누구보다 아티스틱해.
혼자 있을 때의 뉴욕과, 그와 함께 했던 뉴욕은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백 번도 넘게 걸었던 타임스퀘어가 그렇게 모험적으로 보인 적이 없었다.
우리의 마지막 인사는 매우 쿨했다. 안녕, 잘 지내. 그래 너도.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그렇듯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돌아서서 혼자 아스팔트를 걷던 나는 문득 내 신발이 헤질대로 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걸어 다녔으니 신발이 남아날 리가 없다. 처음 눈에 띈 상점에 들어가, 앞 코가 뾰족한 보라색 스니커즈를 샀다. 새 신을 신고 걷던 그 십 여분을 기억한다.
다시 만날 때는 나로 살고 있을게.
듣는 이 하나 없는 도시에 대고 나는 혼잣말을 했다.
누구를 위해서, 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살고 있을 때. 그때 다시 만나.
충분히 내가 나 자신으로 당당하고 나의 뉴욕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때. 그때 다시 그 골목을 쏘다니고 싶다. 그러니까 조만간, 촌스러운 안나수이 스타킹도 다시 사고 싶고, 간판 없는 첼시의 술집도 찾아보고 싶다. 걸음마다 나에게 소중한 말들을 되새김질해주리라. 너는 특별하고, 위대하고, 눈부시다. 혹시 그 밤에 먹먹한 눈을 가진 누군가를 만나, 모험을 떠나자고 하는 것도 좋겠다. 삶의 낙이라는 게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