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비오는 날

by 윤성씨

[자기야 미안해]

액정에 뜬 카톡을 흘깃 쳐다보았다. 쳐다보기가 무섭게 뒤이어 부연 설명이 따라붙는다.

[거의 다 왔는데 비 때문에 차가 너무 막히네]
[미안해 정말로]

나는 백화점 입구를 멍하니 내려다 봤다. 언제부터 비가 왔지. 소나기인가 싶었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허둥지둥 건물 아래로, 지하철 입구로, 하다못해 손바닥 아래로 숨어들어간다.

“그나저나 이렇게 다시 뵈니까 좋네요, 사실 기대 안 했었거든요 오셨다고 해서 혹시나 뵐 수 있을까 싶어서 연락 드렸는데..”

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는 열심히 이야기한다. 언젠가 미팅에서 내 명함을 두 손으로 받으며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다. 나는 라떼 한 모금을 마시며 다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척 한다. 동그란 은테 안경은 알이 없고, 멋을 부린 자켓은 보드라워 보이긴 하지만, 그의 어딘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영 매력이 없다. 백화점 2층의 카페를 태그해서 올린 사진을 보고 문자가 온 게, 30분 전이었나. 그러고 보니 이 백화점에서 일하던 사람이었고, 일 이야기는 더 이상 할 게 없지만 뻔한 이유로 커피 한 잔을 용기 있게 제안해 온 것이다.

“인스타에서 지내시는 모습은 잘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여행을 많이 다니시더라구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창문 밖으로 파라솔만한 우산을 들고 어정어정 뛰어오는 남자가 보인다. 정문 께에서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찾는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두리번거리는 뒷모습이, 우습고 못 견디게 귀엽다.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그의 이마에는 필시 식은땀이 촉촉할 것이다. 늦는다더니 빠르기도 하지. 나는 핸드폰을 한 번 바라보고, 천천히 그를 쳐다보았다.

“맞다, 가보셔야 한다고 했죠.”

“네. 잠깐이지만 반가웠어요.”

일어서려는 나에게, 그는 뜬금없는 질문을 한다.

“남자친구..인가요?”

나는 질문한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은, 내가 잘 아는 눈망울을 닮았다. 결정권이 온전히 타인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의 순종적이고, 절박한, 그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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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9시 반쯤, 이었다. 너의 학원이 끝나던 시간. 나는 학원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너를 기다리곤 했다. 함께 그네를 타며 오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잠깐을, 나는 하루 종일 기다렸다. 가끔 너는 옆 반의 피부가 하얗고, 갈색 빛이 도는 머리칼을 느슨하게 묶는 여자아이와 함께 나타나기도 했다. 내가 항상 그 자리, 그 시간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흠칫, 놀라는 척 눈을 크게 뜨면서, ‘안녕’ 이라고 말하곤 했던. 나의 첫사랑.
우리는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였지만, 1년이 훌쩍 넘게 만난 사이 좋은 커플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계급이 정해진 관계였다. 나는 너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 왼 발을 먼저 옮겨야 할 지 오른 발을 먼저 떼야 할 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생일날 다른 학교 여자아이와 손을 잡고 걷다가 내 친구에게 걸렸을 때도, 내 친구와 노래방 가장 어두운 방에서 속삭이던 모습을 발견했을 때도, 나는 너를 용서해야 했다. 네가 없는 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작고, 작았던 나의 자존심. 너의 손에 온전히 맡겨 있었던 나의 자아를 떠올리면, 그 밤에는 비가 온다. 그 날은 우리가 만난 지 500일이 되는 날이었다. 몇 번이고 헤어졌던 이별의 날들을 빼고, 그냥 만나온 모든 날을 더해서 내가 어거지로 ‘우리의 500일’이라고 꼬깃꼬깃 적어두었던. 속 썩이는 남자친구, 였지만 그래도 너는 내 윽박지름에 선선히 웃으며, ‘알겠어’라고 말했고, 친구들에게 넘겨 들은 소문으로는 케이크를 주문했다더라, 수업시간에 편지를 쓴다더라, 나름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어서 나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 수많은 사연들을 넘은 우리의 500번 째 날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 되겠구나, 싶어 하트를 백 개쯤 그려 넣은 카드를 들고 석양이 채 지기도 전부터 놀이터를 서성였다. 노을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얼마나 예뻐 보였던 지 기억한다. 밤 공기가 얼마나 달콤했는지, 달이 뜨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도. 그러다 - 9시 반을 15분 남겨놓고, 비가 왔다. 당황한 나는 놀이터 한 켠에 있는 아주 오래된 공중 화장실 처마에 주춤 주춤 들어갔다. 쪼그려 앉아도 운동화 코에 빗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아주 좁은 처마 아래서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10시가 넘어갈 때, 다리가 저렸고, 10시 30분이 넘어갈 때는 욕조 두 개는 거뜬히 채울 만큼 흘린 눈물 때문에 눈이 아팠고, 11시가 넘어갈 때는 어지럽고, 멍하고, 춥고, 슬펐다. 그 날 따라 매일 지겹던 엄마의 전화도 울리지 않았고, 친구들의 놀자, 어디야도 없었다. 나는 나의 500일을 너와 함께 보내기 위해 모두로부터 나를 철저히 차단했으니까. 엄마는 내가 지혜의 집에서 파자마파티를 하는 줄로 알 것이고, 내 친구들은 내가 너의 손을 잡고 어디 따뜻한 영화관에서 팝콘을 씹는 줄 알 것이다. 그래서 약속대로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함께 내리는 빗방울이 부러울 만큼, 외로웠다.
처마 위로 또 옥 – 또 옥, 빗소리는 차갑게 규칙적으로 떨어지고, 시간도 그들의 규칙대로 흐르는데, 나는, 나 하나만 갈 곳을 잃었다는 것이. 나를 이 막막한 괴로움에서 꺼내 줄 너를, 찾을 수 조차 없다는 것이, 나를 물 웅덩이만큼 어둡게 만들었다. 어디야, 한 통의 문자를 보내는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다. 답장이 오지 않으면, 그러면 어떡하지. 전화를 걸었다가,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데, 그 절망이 사실이라 해도 차라리 내가 모르면, 모르고 있으면 어떻게든 붙잡고 있을 수는 있잖아. 그러니까 그냥 추워도, 슬퍼도, 그냥 모르는 것이 낫겠다. – 고. 멍청한 결정을 한 나는 그렇게 웅크려 앉아 있었다. 나에게 허락된 건 기다리는 것, 혹시, 혹시 그 생일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왔던 한 통의 문자처럼, 갑자기 미안해, 하며 우산을 들고 나타나 주지는 않을까. 1%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
그 날, 너는 결국 놀이터에 오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난다. 어떻게 그 촘촘한 빗방울을 뚫고 집에 들어 갔는지, 어떻게 죽지 않고 그 축축한 우울함을 견뎌 냈는지는 –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대견할 뿐이다. 비. 지긋지긋한 비를 뚫고 어디로 가야 했을까. 그 날, 그 우울과, 얄팍한 자의식과, 누구도 채워주지 못했던 외로움의 숲에서, 어떻게, 어디로 도망쳐야 했을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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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순박한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나는 건방지지 않아보이려 엷은 미소를 지었다. 뭐래, 그냥 무시하고 일어서는 것이 나다웠지만 - 순간 그가 그의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테이크아웃 잔을 잡으면서 생각했다. 단호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 비극을 낳곤 하는지. 내 움직임을 따라오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네. 맞아요. 남자친구."


얌전하게 인사를 하고,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춘다. 테이블 건너에 앉았던 사람은 떨떠름하게 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우리에게 다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 그림자만큼의 숲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