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기

by 윤성씨

죽음1.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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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배치된 사무실에 짐을 내려 놓았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창문이 너무 멀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 자리 대리님의 파우더 향이 너무 진하다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웃으며 캔 커피 하나를 올려 두었는데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번,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딱. 했다. 까칠한 사람이네, 생각했지만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내 직속 상사라는 것에 나름 기대가 되었다. 사실 잘 하고 못하고 할 분야가 아니긴 하다. 월말에 수수료 정산해주고 빠지거나 잘못 된 것은 없나 계산하는 일이니까. 그래도. 경리 업무에서 여기 내 옆에 앉은 대리님만큼 똑 부러지고 한 번도 실수가 없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잘 부탁 드려요.’

그래서 그 딱딱한 얼굴에 대고 한 번 더 웃으며 말했다. 찬바람 쌩 부는 그녀의 묵묵부답에 내 미소가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퇴근하고 걸어오는 길에 은은하게 목련 향이 나는 것 같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긴 하지만.


20X8.3.15

그녀는 정말 이상하다.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분명 어제 다섯 번도 넘게 자료를 체크해서 보냈다. 10개가 넘는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회사의 월 매출은 300억을 훌쩍 넘는데 1원 한 장이라도 차이가 났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질 것을 알기 때문에 매니저들에게 지급될 수수료를 하나하나, 엑셀 시트를 다 열어가면서 늦게까지 체크하고 체크했다. 틀렸을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여자는 나에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다음에 보낸 메일이 하나 더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그 메일을 열어보았고, 나는 이제 괜찮겠지 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엑셀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가 언제 가라고 했냐고 지금 말대꾸한 거냐고 다시 히스테리를 이어갔다. 황차장님이 와서 자제할 때까지 버릇이 없네, 이래서 대학 안 나온 애들은 뽑으면 안 되네, 거지같은 전형은 없애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서야 끝이 났다.

찝찝한 마음으로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죄송하다고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초조한 마음으로 1이 없어지기를 기다렸다. 설마 읽씹은 아니겠지, 했는데 역시나. 10시가 되도록 내 기나긴 사과 글만 떠있을 뿐 그녀는 조용했다. 우울하다. 현재랑 같이 밥을 먹을까, 했지만 아까부터 야근이라 바쁘다고 했던 터라 연락하기가 미안하다. 혼자 밥 차려먹기도 처량해서 그냥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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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주말 데이트라서 조금 기분이 들떴다. 며칠 전 도착한 원피스도 딱 맞고 화장도 잘 됐다. 그런데 약속시간 30분 전부터 초조하게 만들던 현재는 오후 4시가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부재중 많이 남으면 또 뭐라뭐라 잔소리 할 게 뻔해서 전화도 딱 두 번했다.

[ 나 지금 나가면 돼? ]

[ 현재야 왜 전화 안받아ㅠㅠ? ]

[ 보면 연락줘 .. ]

고민 고민하며 보낸 세 통의 카톡은 1도 없어지지 않은 채 그냥 덩그마니 있다가, 여섯시가 다 되어서야 현재를 불러왔다. 그런데 그 답장이라는 게.

[ 미안해, 늦잠잤다 ㅜ ]

[ 너네 집으로 갈까? ]

슬펐다. 아직 해가 좀 남았는데. 그냥 손잡고 걷는 데이트 하고 싶은데 얘는 맨날 이런 식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너 나 이러려고 만나니 가 목까지 찼지만 아마 평생 말 못 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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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우절 장난으로 사무실 사람들이 내 책상에 하얀 천을 덮고 의자를 치워놨다. 나는 허둥지둥하며 의자를 찾았지만 사람들은 나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했다. 박 과장이 ‘김 주임, 의자 여깄어요.’ 하며 뒤 쪽에서 꺼내줄 때까지, 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방황했다. 의자를 끌고 자리로 돌아오는 나에게 사람들은 장난이에요, 장난, 김 주임 진짜 울겠네, 하며 웃었다. 나도 ‘하하 만우절이죠, 맞아요.’ 했지만, 자리에 돌아와서 하얀 천을 치우고, 컴퓨터를 켜고, 대리님에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속삭인 후 가장 끝의 칸으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왜 눈물이 나오는 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그냥 그 공기 같았던 기분이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았다.


20X8.4.8

현재 핸드폰으로 이상한 문자가 와 있는 것을 봤다. 현재가 씻으러 간 동안 자꾸 전화가 울리길래 가만히 보고 있는데, 김현아 팀원. 이라는 이름이 밤 11시 15분에 왜 울리는 지 모를 일이었다. 프로젝트가 한참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싶어 이걸 가져다 줘야 하나 생각했다. 두 번 째인가 세 번 째에 울리던 전화가 끊어지고 도착한 문자는 [팀장님. 어디에요?]였다. 이 밤에 사람을 왜 찾나, 뭔 큰 일이 났나. 침대로 들어오려는 현재에게 말했다.


‘근데.. 아까 전화가 계속 오던데’

‘전화? 무슨 전화?’

‘김..무슨 아. 현아? 그 사람..’

‘어? 너 받았어?’

‘아니 안 받았지. 근데 문자가 왔던데 너 어디냐고..’


갑자기 현재의 표정이 굳어졌다, 표정뿐 아니라 – 말투도, 행동까지도.


‘야 남의 핸드폰을 왜 보고 지X이야!’

‘아니 내가 일부러 본 게 아니고….’


나는 정색하고 화내는 현재가 무서웠다.

하지만 나의 무엇이 화를 돋구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씩씩대던 현재는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욕지기를 내뱉는다. 나는 그 한 번 시작하면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는 분노를,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 현재가 했던 말을 곱씹는다. 남, 남의 핸드폰. 손가락에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남이었나.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도 그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은 나. 아닌가, 아닌걸까. 혼자 되뇌이던 말이 그만, 입 밖으로 나왔다.


‘남은 아니잖아 우리가’

‘뭐? 너 뭐라 그랬냐.’

‘어?’


나는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무서웠다.


‘아,씨X. 기분 X같네.’


현재는 옷을 주워 입더니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갔다. 쾅, 닫히는 소리에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20X8.4.10

입맛이 없다. 우울하다.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 누워있었다. 경산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기를 들었다가, 그만 두었다. 아빠랑 싸우고 있을 게 뻔하다. 아니라 해도 한풀이를 했다가는 기집애가 서울 가서 고생 사서 한다고 한 바탕 잔소리만 들을 테니.


20X8.4.19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자꾸 문이 열린 옥상을 찾아보게 된다. 어제는 괜히 마포대교를 걸어 집으로 왔다. 희미하게 빛 바랜 글자들이 깜빡이며 힘을 내, 힘을 내, 하는데 그 너머 출렁이는 까만 한강물이 더, 따뜻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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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렇게 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삶이란, 의미란, 공기 같은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으면. 글쎄 없어지면 알까.

흔들거리는 지하철에서도, 불을 켜고 끄는 손이 하나 뿐인 월세 60짜리 원룸에서도, 말 붙일 이도 붙여오는 이도 없는 사무실에서도 나는. 공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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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오히려 편하다. 주말에 물건들을 정리했다. 스물 아홉 해 동안 소비해온 것이 그닥 많지가 않다. 퇴근길에 대리님에게 나름 아끼던 물건 중 하나인 귀걸이를 선물했다. 그녀는 내가 캔커피를 건넸던 날과 같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상자를 받았다.

‘ 나 초록색 별로 안 좋아하는데. ‘

나는 그냥 배시시 웃었다. 이 여자는 내가 죽으면 뭐라고 말할까. 그래도 울어주긴 할까, 그럴리 없다. 문득 사무실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내 사진 앞에 서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 맛이라고 하던 황차장의 눈시울이 붉다. 박과장도, 이 냉혈한 같은 여자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는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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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다. 회사 옥상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과 문턱이 낮은 비상구 문도 열려있다는 것은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 구름이 아주 폭신하게 보이는 오늘. 아이들은 아마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까. 난간 위에 올라서서 마지막 하늘을 본다.

나는 정말 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왜 이 지겹고 외로운 삶을 계속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리 없고 모레가 내일보다 더 좋을 리가. 없다. 엄마 미안해, 아빠 미안해요. 싸우지 말고, 오래 살아요.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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