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을 때, 다행히 나는 익숙한 이불을 덮고 익숙한 전등 아래에 누워 있었다.
남자친구가 나를 이고 지고 집 앞에 데려다준 모양이다. 나는 현관문을 부여잡고 엄마가, 혹은 남동생이 침대에 눕혀주기를 기다렸을 터다. 불현듯 아직도 명절이면 여동생이 놀려대는 영상 속 모습이 떠올랐다. 엘리베이터에서 잠이 들어서, 엄마가 얘가 왜 이래 미쳤나 봐, 난리 법석인데도 일어날 줄을 모르는 추한 덩어리가 - 어제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는 죄 없는 이불을 발로 차다가, 갑자기 움직인 탓에 핑그르 도는 머리를 부여잡는다. 이 놈의 숙취. 운동을 하던지 해야지, 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있다. 일어난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 늑장을 부린 것인데 - 이번엔 그 꾸물거림이 자책스럽다. 아무리 백수라지만 이렇게 놀아나면 되느냐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이불을 걷었다.
꿀꺽꿀꺽 , 냉장고에서 갓 꺼낸 물을 들이켠다.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다. 큰 컵에 얼음과 물을 차례로 담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어 메신저 앱을 누른다. 중요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 왜인지 270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있다. 나갈 수도, 흡수될 수도 없는 애매한 관계들의 대화가 우수수 줄지어 있는 것에, 나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래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이것저것 찌르고 다니지 말라는 건가.
메인화면으로 돌아와 보니, 오늘 생일인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줄지어 붙어있다. 데면데면한 이름들 사이에 한 때 매일같이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썼던 언니가 보인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1:1 채팅을 눌렀다.
[ 언니, 오랜만이에요. ]
축제 기획을 할 때 알게 된 언니다. 마카롱을 만들었던 배경이 독특하다고 생각해서, 유난히 더 기억에 남았다.
[ 세상이 좋아져서 참 다행이에요! 생일 축하해요. ]
간단한 메시지와 함께, 마카롱을 올려두면 찰떡일 법한 접시 세트를 선물했다. 회사원일 때는 커피 한 잔 선물하는 것에도 바들바들 떨었었는데. 차 떼고 포 떼고 살아가는 삶에서 사람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 지 뼈저리게 배운 후로는, 생일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울 뿐이다.
[ 어머. 오랜만이다~ 고마워. 잘 지내지?]
프로필 사진 너머 언니는 언제나처럼 행복하고, 안정되고, 여유로워 보였다. 네댓 장의 프로필을 넘겨보던 나는 허둥지둥 채팅창으로 돌아온다. 멀쩡하게 나를 소개해야 하는 차례인 것이다.
[ 네! 쉬엄쉬엄 보내고 있어요.
많이 배웁니다 하핫 ]
[ 그때 그 시장 일은 계속하는 거야? ]
아직 아픈 손가락인 기억이 새삼 터져 나왔다. 언니에게는 내가 축제팀을 나올 때 이유로 꼽았던 시장 활성화 사업이 나의 근황인 탓이다. 오만 유난을 떨며 그곳을 나왔으니, 궁금할 법도 하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다시 채팅창에 손가락을 올린다.
[ 아, 그 프로젝트는 마무리하고 나왔어요. ]
나는 굳이 그 일, 을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하고 마무리, 에 밑줄을 치고 싶은 기분을 느낀다. 인생을 배우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애써 칭칭 감아 무의식 깊은 곳으로 꾹꾹 누르는 중인 것이다. 어떻게든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 아 그래? 의외다. 그럼 지금 뭐해? ]
[ 그냥 ...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어요. ]
[ 그렇구나. 잘할 거야 너는 뭐든 ]
[ 고마워요 언니 ]
[ 언제 한 번 만나자. 차 한 잔 해야지 ]
[ 네 그래요! 좋은 하루 보내요 언니 ]
언제 한 번 만나자, 는 말은 주로 기약 없는 시기까지의 작별인사와 비슷하다.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굳이 서로의 캘린더를 확인하지 않았다. 파란색 채팅창 배경을 꽉 채우는 몇 개의 요란한 이모티콘을 주고받고, 짧고 굵은 대화는 마무리된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나는 실망인지 피곤인지 모를 망망한 기분으로 앉아있다. 떠다 놓은 물 한 잔에도 흔쾌히 손이 가지 않았다.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이대로는 오늘 하루도 멍하니 앉아있다가, 기계적으로 밥을 먹고 컴퓨터를 깔짝이다 끝날 것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본다. 어디로 갈까. 을지로에 새로 생겼다는 서점, 거기를 가볼까.
그래 그게 좋겠다. 책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오늘의 할 일에 유의미한 일정이 추가된 것에 안심하며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화장실에 들어섰다. 샤워를 하는 동안 오늘 입을 옷을 머릿속으로 고른다. 이렇게 우중충한 때는, 그 핑크색 벨벳 원피스에 하얀 코트가 좋겠다. 거울을 지날 때마다 겉으로나마 화사한 실루엣을 마주치면 한 번이라도 더 웃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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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미어터진다는 서점은 평일이라 그런가 한산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기 때문인가.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는 책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본 여행, 을 주제로 한 책장에는 일본식 다도 세트가 함께 놓여있고, 필사 책 코너 앞에는 글을 적어볼 수 있는 종이와 펜, 앉음직한 의자도 놓여있다. 찬찬히 다양한 주제를 살펴보다가 회사와 그 이후의 삶을 다룬 코너 앞에 멈춰 선다. 퇴사, 방법, 여행, 추억... 단어와 주제는 다양하지만 바라보는 독자와 감정은 유사한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나는 마음에 와 닿는 책 한 권을 골라 들고 창가 앞 소파에 앉았다. 나다운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응원에 괜히 마음이 동했던가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와, 질문과 적절한 설명을 통해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해주었다. 한 권의 책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으면서, 그 말 마디마디가 참 따뜻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녀는 할 수 있으니까 힘을 내라고 하는데 왜 나는 결코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다 읽은 것이 미안해서라도 이 책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막상 만 얼마의 돈 앞에 망설여지는 내가, 어떻게 그녀처럼 절망을 딛고 삶을 바꾸고 비상할 수 있다는 말인지.
그래, 다 나의 배배 꼬인 생각 탓이다.
좋은 의도로 말하는 사람에게도 흔쾌히 고마워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마음의 방에 앉을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생산적인 활동 - 이를테면 독서, 라는 -을 끝낸 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야 할 것도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더 답답, 한 것이다.
털레털레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즐겨찾기에 지정된 집, 을 꾹 눌렀다. 그리고 습관처럼, 아리를 찾는다.
"아리야."
"띠링"
T맵의 음성인식 소프트웨어는 피곤이 잔뜩 묻은 내 말에 즉각 응답했다.
"남자 친구에게 전화해줘"
"남자 친구님에게 전화할게요."
"그래."
대답 대신 뚜 - 뚜 - 통화연결음으로 바꿔주는 센스.
연결음이 오래지 않아 졸림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가 나타난다.
"여보세요."
"안녕. 자고 있니?"
"안 잔다. 너 목소리가 왜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다."
"아닌데. 뭔가 심통 났는데."
그런 거 아니야,라고 했다가는 그럼 뭔데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과 잔소리 메들리를 집에 도착하는 15분 동안 내내 들어야 한다. 다년간 경험에 의해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택했다.
"아니. 어떤 언니가 나에게 지금 뭐하고 지내냐고 물어봤는데 - 물론 아무 의미 없이 이야기했겠지만 그 말이 너무 불편했어"
어떤 언니,라고 말할 때 책 속에 있었던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와 비슷한 질문이 떠오른 것은, 정말 나의 과대망상일까.
"음."
"그냥 나를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 거야. 나를 필요로 하지도 말고, 찾지도 말고, 신경 쓰지 말고."
"너 여유가 없구나."
"무슨 여유"
"마음의 여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듣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맞아."
남대문 옆을 지나가면서 나는 또, 습관처럼 깊 - 은 한숨을 내쉬고 만다. 정말, 나는 아무도 나를 건들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게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상관없이. 대답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에너지조차 오늘의 앞가림을 하기 위해 끌어다 쓰고 있는 실정이니까.
수화기 너머로 잠잠하던 남자 친구님은 숨소리를 몇 번 내뱉더니 말을 이어간다.
"나한테 가방이 있어.
삼분의 일 정도만 차 있어야 걸어가다가 물병도 넣고 휴지도 챙기고 하는데. 그게 꽉 차있다고 생각해봐. 누가 선물을 해줘도 싫어진다고."
그렇다면 내 가방은 지금 제대로 잠기기나 할까.
아마 지퍼가 터지기 일보직전 이리라.
"내 가방 터질 것 같아."
"여유를 찾아야 해."
"여유. 그거 어떻게 찾아."
"여유는 찾는 게 아니야. 마음을... 넓히는 거지."
마음을 넓힌다니. 가방을 버리고 새로 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마음이 넓다는 건 어떤 걸까."
"글쎄. 그건 오래 갈고닦아야 하는 거야."
"그래.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겠지.
10년 후에 마음 넓은 내가 되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되는 건지 궁금하다고."
"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말을 꺼낸 사람이 그걸 모르면 어떡해.
궁시렁거리려다가 문득 생각이 연결된다.
"마음 넓은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지?"
"음...."
대답 없는 남자 친구 씨는 처음과 같은 콧소리만 낼뿐이다. 고로 질문한 사람이 도로 답할 수밖에 없다.
"흔히.. 이해심이 넓은 사람들 보고 마음이 넓다, 고 하지 않나?"
"그렇기도 하지."
"그럼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면 이해심을 키워야 하는 건가 봐."
"그럴 수도 있겠네."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질문도 그러려니 할 수 있으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지겠다."
아파트 후문으로 들어서기 위해 유턴을 하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나는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자기만의 방에 갇혀서,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거지."
"그래. 그런 사람도 있지."
그런 사람들까지 이해할 때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막을 내리는 것인가. 그 질문에까지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벌써 집에 거의 다 와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운전하면서 생각하기에는 너무 - 중차대한 주제였기 때문에.
사실 생각을 더 오래 한다고 답이 나오는 질문인지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