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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Dec 04. 2019

자살을 막기 위해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

죽어야 하나, 생각하게 한 것은 대단한 폭력이나 사업실패가 아니었다. 허락받지 않은 사진을 사이트에 올린 것에 대한 클레임을 받자, 지난 2월부터 해왔던 모든 연구와 도전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게, 기본도 없는데 뭔 사업을 하지. 누가 누구를 돕겠다는 거야 대체.'

'맞아, 나는 배웠다는 사람이 자세가 안 되어있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서 못 견디게 속상했다.
그 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면서 누군가를 치유하겠다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실망이에요 실망이에요, 그 말이 문에서, 책상에서, 침대에서 왕왕 떠들었다. 아, 나는 그 기본적인 저작권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1년을 쏟아부어 치유 미술이라는 것을 시작했구나.
쓸모없다. 자격 없다. 필요 없다.
시장에서 정육점 아주머니가

'니가 여기 와서 한 게 뭐가 있는데'

라고 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는 고작 이 정도다.
나는 결코 변화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고, 뭔가 해보려고 해도 실망을 주는 사람일 뿐이다.


-

이 생각이 14일 이상을 가면 나는 우울증이 된다.
6개월 이상을 가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1년이 넘어가면,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게 암담한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나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준 고마운 분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트리거가 될 수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칼비테 교육법]에는 어린아이였던 칼이 부당한 짓을 한 사람을 공개석상에서 판단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직 어린아이였다고 하더라도 6개 국어에 통달한 천재 법학자이며 지금까지도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어린 박사 학위 소지자’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의 판단이었으니 아마도 옳은 소리였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칼을 나지막이 꾸짖는다.

“왜 그 사람을 위해 침묵하지 않았니?
너만 그 사람의 부당한 짓을 알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한 거니? 얘기해보렴 얘야.”


잘못을 묵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부정을 비출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칼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절대로 공공연하게 누군가의 잘못을 들추어 망신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지극히 일반적인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건가? 저 사람이 분명 잘못한 게 맞는데 그냥 내버려 두라고?’


이럴 때를 대비해 현명한 아버지는 대답을 적어두었다.

“아니! 진실하지 못한 거짓말쟁이가 되거나 위선자가 될 필요는 없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단다.”

스스로가 어떠한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전까지 시시콜콜한 부분을 꼬집어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사정없이’ 들추어내는 것은 정말로 부끄러운 짓이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만큼 수치심을 자극하는 일이 있을까? 수치심은 사회적 자아를 공격하는 치명적인 감정이다.

사이버 수사대에 본인의 성관계 동영상을 신고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본인이라는 것을, 그들 중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것을 떠올려보자. 잘못한 건 상대방인데 스스로가 죄인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은 언급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무엇이 그들을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남성들이 내 알몸을 보고 시시덕거릴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이다. 여기서 ‘도대체 누가 그녀를 부끄럽게 만들었는가’는 논제가 아니다. 인류 역사 상 ‘악’은 언제나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빌어먹을 법칙이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상처 받은 누군가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스스로를 긍정하고, 제삼자에게 본인이 당한 불평등을 강요하지 않는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남도록 격려할 것인가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연애에 있어 최고의 명언이 떠오른다. 남자는 남자로 잊는다는 말.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사람의 위로와 응원, 사랑으로 치유된다.
그래서 사회에는 좋은 - 다시 말해 성숙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을 정의하기보다 반대의 개념을 떠올려보는 것이 더 쉽겠다.

미숙한 자아는 끝없이 판단한다. 스스로를, 또 상대방을.


'너는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엄청 못생겼네.'

'대학 안 나왔다고? 더 볼 것도 없어.'

'이혼한 집 애들이 다 그렇지 뭐. 가정교육 못 받아서 그래.'


거울에 대고 스스로를 저주하는가 하면, 딱 그만큼의 악독으로 누군가를 비방한다. 늘 날이 서 있고, 공격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공격한다.

보복 운전, 필요 이상의 비난, 악성 댓글, 따돌림.

왜 소통하지 않는가?
상처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왜 용서하지 않는가?
화해의 따뜻함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잘못을 참아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보여주는 오늘의 성숙함이 돌고 돌아 살만한 사회를 만든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체계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한 사회의 자살률을 결정한다.”

지금 그 사람의 작은 실수, 그냥 웃어 주자.

당신은 좋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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