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에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3개월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앰뷸런스에 2번 실려갔고 1번 발목을 접질렸던, 인상적인 시기였다. 특히 2번째로 병원에 갔을 때는 머리가 깨져 피가 많이 났고 바늘로 뒤통수를 여러 번 꿰맸다. 죽음의 문턱을 10시간 넘게 두드리다 겨우 깨어났는데 반나절 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알았지만 비자도 없이 치료도 어려운 타지에 남아있는 것도 최선은 아니었다. 그래서 붕대를 칭칭 감은 채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앉았다. 열 네댓 시간 동안 내가 묵상한 것은 살고 싶다는 열망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토록 가벼운 생을 살아가는 이유를 묻게 되더라.
스물셋이 묻기에 적절한 질문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뉴욕으로 떠날 때 결정한 멋진 삶의 기준은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깜깜한 결론 옆에 놓고 보면 돈을 많이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다 허무하다. 리무진 파티를 마치고, 클럽 루프탑에서 뉴요커들의 생일 축하를 받던 스물셋 여자애가 불과 몇 시간 만에 피를 쏟으며 길가에 쓰러질 수 있는 법이니까. 당시 내가 내린 최선의 답은 '주어진 날을 열심히 살자'였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치료를 받으며 복학을 했고, 경영을 부전공했고, 3.2 수준의 평균 학점을 3.8로 만들어 졸업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머리가 깨진 경험 때문에 그 일들을 해냈다기보다 그냥 하루 주어진 일을 그 날 했다. 살아야 하는 거창한 이유는 모르겠으니 눈 앞의 목표를 희망 삼아 걸은 것이다.
희망. 돌아보면 희망은 항상 유일한 돌파구다. 모두의 모든 것이 안돼, 불가능해, 나를 붙잡고 넘어뜨리려 해도 실낱같은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들면 기어이 그 촛불 같은 빛이 불안과 무서움을 몰아냈다.
퇴사 후에 처음 사기를 당했을 때도.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몇백만 원이 사라졌을 때도. 사랑하는 공동체에 나에 대한 험담이 퍼졌을 때도. 코로나 덕분에 수업이 없어서일까, 공방 내놓았냐는 연락을 부동산에서 받게 되는 요즘에도.
마포대교 한 번 안 가보고 그 시기를 겪어왔다고는 못하지만 죽을 만큼 차가운 겨울도 결국 다 지나가고 봄꽃이 핀다. 항상, 언제나 그렇다. 밤과 아침의 반복을 수십 번 보고 있노라니,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시기야말로 희망을 품기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주는 환상을 응원삼아 걷다 보면, 꿈같은 장면이 현실로 바뀌리라고 믿는다.
문득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찾았던 병원이 떠오른다. 깊숙한 상처를 안타깝게 보시던 선생님은 빨리 조치를 한 덕분에 큰 이상은 없겠지만 이 부분에 머리카락은 못 자라겠다고 하셨었지.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뒤통수를 쓰다듬어본다. 어디가 상처부위였는지 찾기 위해 한참 매만져야 할 만큼 머리카락이 수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