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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Apr 11. 2017

#.Prolog. 아주, 어른들의 시간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붙잡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 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 그냥 돌아서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예쁘게 입고 갔더라면,

구두굽이 1cm만 더 높았더라면,

한 번 붙잡기라도 했더라면,

한 번 더 웃어보였더라면,

차라리 울기라도 했다면.

달랐을까.







2017년 4월, 누구에게나 잔인하다는 계절이 잔인하다 못해 쓰라려서 은수는 소주팩을 쪽쪽 빨며 심야기차에 몸을 싣고 눈물을 훔쳤다. 알싸한 알콜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잠깐, 너무 써서, 눈물이 멈추다가도 그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처음 보는 여자라는 듯 은수를 지나치던 성욱을 생각하면 다시 뜨거운 설움이 차올랐다. 나한테 왜 그랬냐고 뒤돌아 가슴팍이라도 치고 싶었는데, 땅바닥에 떨어진 심장의 무게로 눈물이, 빌어먹을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을 신명나게 떨어뜨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은수보다 서너살은 더 어려보이는, 다시 말해 성욱과 열살 차이는 날 법한 어린 여자아이는 은수를 지날 때 또박또박 종알거렸다.


오빠, 아는 사람이야?


그리고 이어지던 까르르. 그 놈의 웃음소리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서 술이 활딱 다 깼다. 은수는 애꿎은 소주팩만 구길대로 구기다가 잠이 들었다, 잠이 들었었나보다.


다음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부산, 부산역입니다.


안내 메시지를 들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눈을 뜰 수 있었는 지 모르겠지만 눈을 떴을 때 가뜩이나 한산했던 열차 안은 텅 비어있었다. 홧김에 예매한 새벽 기차였던지라 챙길 짐도 없었다. 성욱에게 잘 보이려고 신었던 구두에 구겨넣는 발끝이 괜히 더 아팠다. 부산역 계단을 내려오면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이었다. 늦었다면 참 늦었고 어찌보면 아직 한참인 시간에 한숨 자고 일어났다고 술기운까지 깨고나니 바다생각이 간절했다. 은수는 가장 먼저 보인 택시에 올라 짧게 말했다.


광안리요.


도시 그 자체인 부산역 일대를 지나, 바다 위를 가르기까지. 한산한 대교 위의 택시는 부산의 밤빛을 번지우며 달렸다. 좋다면 참 좋을 수 있었을 한 밤의 질주가 은수에게는 슬프기 짝이 없었다. 물인지 하늘인지 구분이 가지않는 검정 도화지에 점점이 반짝이는 불빛들이 은수의 젖은 눈에는 사방 팔방으로 번져, 은하수 같았다. 광안리에 도착을 해도 막상 갈 곳은 없었다. 문득 구두가 너무 아프다고 생각한 은수는 2,3층에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새벽 체크인인 주제에 오션뷰로 굳이 굳이 방을 받아내고 올라가니 반짝이는 광안대교가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예쁘네.


대상도 없이 속삭이던 은수는 괜시리 서러워져 호텔 슬리퍼를 짝짝 끌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잠들기 위해서는 소주가 필요했다. 봄밤의 모래톱은 차렵이불마냥 따끈해보였고 드나드는 파도소리는 자장가같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은수는 편의점에 들어가 자몽에 이슬을 찾다가 뭔 놈의 해변가 편의점에 자몽에 이슬 한 병이 없담, 실망을 하고 사이다 한 병과 참이슬 한 병을 사 들고 나왔다. 해안가에 앉아 멍하니 바닷물을 바라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지나갔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성욱이었다. 은수는 솟아오르는 깊은 분노에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술기운도 오른 김에 없던 용기가 튀어나와 은수를 달려가게 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욕지거리가 쏟아졌다. 은수는 모래톱을 가르며 달려가 남자의 등에 주먹 세례를 갈겼다.


왜.. 왜 이러세요!


뒤돌아선 남자는 은수를 모른다는 듯 주먹을 막아냈다. 그런 모습이 더 미운 은수는 발길질을 하며 낮에 못다한 말까지 싹싹 긁어 모아 소리를 질렀다.


너 나 몰라? 왜 나 모른척해? 낮에는 서울에서 다른 여자랑 팔짱끼고 걸어가더니 지금 여기서 뭐 하는건데! 또 다른 여자 만나러 왔냐!!!


은수의 두 팔을 잡고 주먹을 막아내던 남자는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은수의 악다구를 총알 받이처럼 들었다. 참을성있게 듣던 남자는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서울요? 다른 여자라구요?

사람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은수는 번진 눈물을 닦고 성욱을 똑바로 바라봤다. 싱긋 웃는 얼굴은 딱 서울의 성욱과 판박이인데 뭔가, 달랐다. 모든 여자에게 일단 자기야, 로 입을 여는 능글맞음이, 10분에 한번씩 다리를 흘끔이는 엉큼함이 없었다. 완전 닮은 다른 사람인건가.


미.. 미안해요. 너무 닮아서.


은수는 머쓱해졌다. 그저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이 새벽에 왠 봉변이람 싶어 미안해졌다. 남자는 은수의 사과를 흔쾌히 받아 주었고 꽤나 친절한 제안을 했다.


뭔가 속상한 일 있으신 것 같은데. 들어드릴까요?


어차피 마시던 소주는 비워야했던터라 은수는 남자를 발견하기 전에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은수가 앉던 자리로 타박 타박 걸어온 둘은 광안대교를 바라보며 앉았다. 은수는 종이컵 하나를 더 꺼내 소주와 사이다를 타서 남자에게 건넸다. 그러고보니 이름도 모르는구나.


뭐라고 부르면 돼요?


최성욱이에요.


네?


잘못 들었나 싶어 은수는 재차 물었다. 몇 번을 물어도 성욱을 꼭 닮은 사람은 자기 이름이 최성욱이라고 했다. 광안리 한복판에 앉아 소주를 기울이며 성욱을 꼭 닮은 성욱에게 은수와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상했다. 서울의 성욱을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하소연을 하려다가도 그 얼굴만 보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쪽이 그 사람을 너무 닮아서 말을 못하겠어요.

성욱씨 이야기 해주세요.


성욱은 은수의 문답에 순순히 응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은수는 오소소 돋아오는 소름을 감출수가 없었다. 은수의 앞에 앉은 성욱은 학교도, 사는 곳도, 혈액형도, 가장 좋아하는 책도, 여행지도, 가족 수도, 고향도, 목소리와 왼쪽 귀 뒤의 점까지도 서울의 성욱과 똑같았다. 은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정말 똑같네.


B형이라구요?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아, 저는 지금 학생이에요. 부산대 다니고 있어요.


학생이라고까지 하니까 서울의 성욱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 안심이 됐다.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저는 85년생이에요. 이제 스물일곱. 몇 살이에요?


은수는 이상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응..? 저도 스물일곱인데, 스물일곱은 91년생이에요!


에이 91이면 이제 스무살이잖아요.


헛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내가 술이 많이 취했나보다. 은수는 혼자 생각을 하며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고 중얼거렸다. 91년생이 스무살이라고? 85년생이 스물 일곱이라고? 뭔 말도 안되는 계산법이야. 성욱도 말도 안되는 나이 소리를 계속 이어가지는 않았다.


그럼 서울에서 내려온거에요?


네. 성욱씨랑 똑 닮은 어떤 놈 때문에 속상해서요.


언제 올라가려구요?


기약없이 내려온지라 올라갈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수업도 지난주에 끝이났고 새로운 학원을 알아볼 생각이었으니까.


모르겠어요. 괜찮아질 때까지 있을거에요.


그럼 그 때까지 친구해 드릴게요.


친구해 준다는 표현, 성욱이 참 자주 쓰던 말이라는 게 생각났다. 문득 다시 눈물이 차올라 은수는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은수의 어깨를 토닥이는 성욱의 손이 따뜻했다. 은수는 비틀거리며 일어선 자신을 일으켜 호텔 앞까지 바래다주는 부산 성욱이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살이라구요?


85년생 스물일곱이라구요.


후, 헛소리 정말.


고개를 저으며 들어선 호텔룸에는 나갈 때와 똑같은 광안대교가 걸려있었다. 창 너머로 반짝이는 불빛이 여전히 고왔다. 씻어야지,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침대 옆 탁상 위 달력이 눈에 띄었다. 아까의 헛소리들이 떠올라 괜히 달력을 집어 들었다.

2010년 4월 6일.

호텔 달력에는 2010이라는 숫자가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은수는 터져나오는 어떡해,를 막으려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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