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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Apr 16. 2017

#1. 7년 전 오늘,에서 맞은 아침.

끼룩이는 갈매기 소리에 눈을 뜬 은수는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났다. 어제 속을 생각 않고 부어댄 소주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다시는 술 안 먹을거야 어휴'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놈의 달력이 또 눈에 띈다. 갑자기 어제 일들이 100m 달리기 선수들처럼 기억 속에서 달려나왔다. 낯설고 어린 여자와 지나가던 성욱, 소주팩을 부여잡으며 울었던 부산행 기차 속, 광안리에서 만난, 85년생이 스물일곱이라고 우기던 또 다른 성욱, 지금 눈 앞에 놓인 7년 전이 분명한 2010년의 달력.


"이건 말도 안돼."


은수는 탁상 위 전화기를 들어 프론트에 전화를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참을성있게 들었을 긴 인삿말을  잘라먹고 질문을 던졌다.


"죄송한데, 오늘 며칠이죠?"


"안녕하세요 고객님, 오늘은 4월 7일 수요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한데 지금 제 달력이 2010년으로 되어 있어서요."


전화를 받은 안내원은 당황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 오늘은 2010년 4월 7일이라 2010년 달력이 객실에 놓여있습니다."


"네? 2010년이라고요? 오늘 만우절 아닌데 장난 치시는거 아니죠?"


죄없는 안내원에게 물을 질문은 아니었지만 은수는 쏟아지는 물음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제부터 은수만 빼고 세상이 다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 같아 뭐라도 붙잡고 싶었다. 인내심깊은 안내원은 친절하게 은수의 예의없는 질문에 답했다.


"고객님, 오늘은 2010년 4월 7일 수요일이 맞습니다."


말도 안돼. 수선스럽게 감사합니다를 뱉어낸 후 은수는 아이폰의 사파리를 클릭했다. kbs뉴스를 검색했다. 오늘의 뉴스 날짜로 2010.4.7이 뜨는 것을 보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네이버랑 kbs랑 짜고 대국민 사기를 치는건가? 은수는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3년 전부터 따로 살기 시작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까지 나한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거야. 두 세 번의 통화 연결음이 삼십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엄마. 지금 엄마 딸 몇살이야?"


"응? 무슨 소리야 그게. 것보다 너 지금 어디야? 학교는 어쩌고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


학교? 졸업한 게 언제인데 학교 타령을 하는 엄마가 답답했다. 은수는 침착하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엄마. 나 지금 완전 진지해. 지금 몇 년도야?"


얘가 술을 하도 처먹고 다니더니 미쳤나보다,를 시작으로 엄마의 잔소리는 3분 넘게 이어졌다. 듣다 못해 은수는 백기를 들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엄마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근데 진짜 제발 지금 몇 년도야?"


"미친년아, 지금 2010년인걸 몰라서 물어? 너 나이도 말해주랴?"


"응. 나 몇살이야 엄마?"


"은수야. 너 갑자기 정말 왜 그러니. 스무살에 벌써 치매 이런게 온 건 아니지?"


엄마의 입에서까지 지금이 2010년이라는 말과, 스무 살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은수는 숨이 탁 막혔다. 더 묻다가는 엄마가 부산까지 쫓아 내려올 것 같아, 늦은 만우절 장난이었다고 너스레를 떨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은수의 멍한 표정이 거울에 비쳤다.


'지금이 2010년이라고?'


은수는 화장대 앞에 앉아 피부를 찬찬히 살폈다. 몇 달 전부터 신경 쓰이던 목주름과 눈가 주름으로 눈길이 갔다. 파운데이션을 덧대어야 했던 목가가 조금 탱탱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나 지금 스무살이라고?'


은수는 뭐부터 어떻게 해야하는 지 막막했다. 그럼 내 모든 게 다 7년 전으로 돌아간건가? 나 이제 수업도 못해? 은수는 덜컥 겁이 났다. 당장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확인을 해야만 했다. 네이버에 '폴댄스'를 검색했다. 평소 같았으면 주변 가까운 센터가 한 개 정도는 뜰텐데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해외 폴댄스 사진, 영상 따위의 시덥잖은 웹문서만 줄줄이었다. 은수는 애가 탔다. 스트레칭을 해보았다. 그저께 수업때 했던 자세가 그 때만큼 수월했다. 앞 뒤로 다리를 뻗고 양 옆으로 다리를 뻗어 보았다. 맨 바닥에 허벅지 아래가 물 묻힌 종이 붙듯 딱 붙는 것도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폴을 평소처럼 탈 수 있을 지 불안했다. 문득 은수는 몇 년 전 부산 여행 때 폴이 오십개 쯤 되어 보였던 서면의 클럽이 생각났다. 이름이... 픽스였던가. 재빠르게 네이버에 부산 픽스를 검색했다.


'부산 픽스'에 대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뭐!? 아 지금 2010년이지. 암담해진 은수는 심호흡을 하고 부산 클럽을 검색했다. 폴 있는 클럽이 한 개 쯤은 있을거야. 해운대에 위치한 막툼과 엘룬이라는 곳이 가장 많이 떴다. 여기다. 여기부터 가봐야지. 은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고 누웠다.


밤 10시. 호텔 2층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은수가 일어서자 여기 저기 테이블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큰 키에 힐까지 신은 탓에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진 것도 있었지만 팬티나 겨우 가릴법한 아슬아슬한 길이의 핫팬츠에 배꼽이 드러난 탑을 타이트한 블루종으로 가리려한들 가려질리가 없었다. 몇 년 째 폴댄스 수업을 하며 받아온 시선이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7년 전으로 돌아와서도 그대로라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다. 호텔 앞에 줄지어 선 택시에 올라탄 은수는 어정쩡하게 목적지를 말했다.


"엘룬..? 이요."


택시기사는 이 시간에 그 차림의 여자가 갈 곳이 그렇지, 라는 듯 묵묵히 밤 공기를 달려 파라다이스 호텔 앞에 도착했다. 복잡스러운 호텔 앞에 선 은수는 입구를 관찰했다. 포스터가 조금 촌스러운 것 빼고는, 여자들의 화장이 굳이 저럴 필요가 있었나 싶을만큼 화려한 것 빼고는, 남자들의 바지가 남사스럽게 딱 달라붙는 것 빼고는. 2017년의 여느 클럽 앞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항상 데리러 나와주던 클럽 매니저들이 없다는 게 큰 차이라면 차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긴 줄을 침착하게 기다린 은수는 밴드를 받아들고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불을 켜고 폴을 찾아다녔다. 분명 이런 어둑한 계단쪽이나 테이블 근처에는 으레 은색의 길고 곧은 폴이 자태를 빛내기 마련인데 왜 이렇게 찾기가 힘든건지 답답했다. 나름 한 층을 꼼꼼히 뒤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눈에 띄지 않자, 은수는 누군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입구에 서 있는 가드는 좀 무서웠고, 폴 위치 따위 알 것 같지도 않았다. 테이블 서버는 큼직한 바틀을 나르느라 바빠 보였고 벽에 팔짱을 끼고 한껏 멋을 부린 여자들은 대꾸도 않을 것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던 은수의 눈에 두세 명의 바텐더가 보드카를 따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기다.


"폴 없어요?"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바텐더에게 은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폴 없냐고요!! 봉!! 이렇게 긴 거!!"


멀쩡하게 생긴 여자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르자 바텐더는 귀에 손을 모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스테이지 왼쪽 구석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가보니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 폴이 보였다. 은수는 물만난 고기처럼 인파를 헤치고 스테이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스무살도 좋고 다시 시작도 좋지만 갈고 닦은 폴실력을 처음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스테이지 보다 살짝 낮은 단상 위에 단단히 박혀있는 폴을 잡는 은수에게 모든 시선이 고정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수는 폴을 잡던 날처럼 심호흡을 하고, 눈을 딱 감고, 클라임 업을 했다.


'오?'


두 번의 클라임업으로 왠만한 남자 키만한 높이로 올라가서 폴 싯을 해보았다. 은수는 연결되는 동작들 하나하나가 콘테스트날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에 감사했다. 사실,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날 엘룬에 왔던 남자들이었다. 에로 영화에서나 보던 폴댄스를, 10g도 안 될 것 같은 두께의 옷을 걸친 여자가 10분도 넘게 눈 앞에서 펼쳐 보이고 있으니. 왼쪽 스테이지 앞은 사탕을 떨어뜨린 모래밭의 개미떼처럼 바글바글해졌다. 웅성이는 소리에 은수는 문득 정신이 들어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입을 헤 벌린 남자들과 있는대로 눈살을 찌푸린 여자들이 한가득했다. 덜컷 겁이났다. 폴에서 내려 온 은수는 좀비처럼 달려드는 남자들을 피해 내달렸다. 술 한 잔 해요를 열 두 번 째쯤 들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은수의 손목을 잡았다.


"여기서 또 보네요."


잡힌 손목을 한 번 보고 손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성욱이었다.


"구해드려요?"


은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할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성욱은 그런 은수의 손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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