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씨 Apr 20. 2017

#2. 안녕하세요, 성욱씨.

은수를 반쯤 안은 성욱은 북적이는 인파 틈에서 잘도 길을 트며 나아갔다. 은수에게 꽂히는 시선만큼이나 성욱이 지나갈 때마다 수군대는 소리가 컸다. 바 앞을 지날 때는 은수에게 폴의 위치를 알려주었던 바텐더가 성욱과 눈을 마주치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들기까지 했다. 뭐가 최고라는거야, 은수는 귀까지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바글바글한 사람 숲을 잘도 헤치고 나아가던 성욱은 코너로 돌아 가더니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고 나자 쾅쾅대던 클럽의 소음이 음소거라도 한 듯 잠잠해졌다. 캄캄한 바닥만 보며 걷던 은수의 까만 구두의 배경도 깔끔한 대리석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드니 고급스러운 조명이 벽들에 걸린 조용한 복도였다. 이제 달려드는 남자들도, 손목을 잡아채는 손들도 없는데 은수의 어깨를 감싼 성욱의 손은 여전히 위험한 정글을 걷기라도 하듯 묵직했다.


"어디 가는거에요?"


"쉿, 오빠만 믿어요 스무살 아가씨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앞을 막아서던 우람한 가드는 성욱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엘리베이터 문을 열었다.


"어디 가는거냐구요!"


"구해드린다고 했잖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일곱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을법한 큼직한 문이 나타났다. 성욱은 카드키를 꺼내 태깅을 하고 문을 열었다. 은수는 집 문을 여는 것마냥 자연스러운 손길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은수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탁 트인 오션뷰의 창문이었다. 창가 바로 앞의 큼직한 테이블에는 일고여덟명의 남녀가 쌍쌍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붉고 짙은 와인 병과 위스키병이 먹음직스러운 음식들과 함께 쏟아질 듯 한가득이었다.

"성욱! 어? 누구야?"

깔끔한 머리을 곱게 올린 남자 한 명이 성욱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성욱은 은수의 어깨를 더욱 자신 쪽으로 당기며 맞받아쳤다.

"완전 예쁘지?"

해운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창가 앞에 둘러 앉은 여자들은 은수를 흘끔댔다. 그들의 눈에 담긴 차가움의 이유를 은수가 알 리가 없었다. 여자들은 일신 그룹의 막내 아들이 온다는 말에 한껏 치장을 하고 나왔는데 그 어깨에 폭 안겨 들어온 은수가 궁금했다. 부산에서 성욱을 모르는 여자는 없었다. 부산의 내로라하는 요식업과 엔터테이먼트사업은 성욱의 아버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버지와 함께 묵묵히 비즈니스에 몰두하는 두 형들과 달리 성욱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에 탁월했다. 광안대교에서 첫 부산세계불꽃축제를 진행할 때 기자간담회에 나타난 성욱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일신그룹의 젊은 막내아들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이 큰 몫을 했다. 조목조목 기획의도와 컨셉을 설명하는 성욱의 모습이 보도된 후 여자들은 모여 앉을때마다 그의 사생활을 부지런히 탐색했다. 클럽을 자주 간다더라, 여자는 몇 명이라더라, 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막상 실질적인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부산대에 성실히 재학하며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는 당찬 모습이 지저분한 구설수는 카더라일 뿐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성욱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나 알 수는 없는 남자였다. 그런 성욱과의 술자리에 대뜸 짤막한 핫팬츠에 아슬아슬한 차림의 은수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여자들의 속이 좋을 리 없었다.

소파에 은수를 앉히고 발렌타인에 얼음과 보리차를 듬뿍 섞어 건네는 성욱의 손을 바라보면서 은수는 입이 열리지 않았다. 말투며 손동작이며 2017년의 성욱과 꼭 닮아서 소름이 끼쳤다. 7년 전인 지금도 그 때처럼 오만 여자를 다 찌르고 다닐까? 은수의 이마가 쿠킹호일처럼 구겨졌다. 성욱은 술잔을 잡기만 하고 입에 댈 줄 모르는 은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보통의 여자들은 엘룬 지하에서 춤을 추는 이유가 이런 술자리를 위해서인데, 그래서 데리고 올라오면 쑥스러운 척 하다가도 막상 방 안으로 들어오면 부어라 마시고 좋아 죽겠다고 헤헤 거리곤 했는데 이 여자의 눈살은 왜 더 찌푸려진 걸까. 성욱은 은수를 자기 쪽으로 돌려 이마를 맞댔다.

"이마 펴줄게요"

은수는 갑자기 가까워 온 성욱의 온도에 움찔했다. 
앉아있던 사람들은 이마를 맞댄 두 사람에게 앙드레김 패션쇼 피날레냐며 놀려댔다. 이죽이는 목소리와 여자들의 차갑기 짝이 없는 눈살에 신경이 쓰인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밀치고 성욱에게 말했다.

"저 가볼게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가겠다구요?"

파도처럼 잡아대던 지하의 남자들이 생각났다. 은수는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술에 취해서 때리고 욕하는 거 받아주고 데려다 주고 했는데 가겠다구요?"

은수는 어제밤 광안리 해변이 떠오르면서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성욱은 빨개진 은수의 볼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다짜고짜 주먹질을 하고 혼자 클럽에 와서 봉을 타던 대찬 여자가 맞나.

"어제도 고마웠어요."

"그냥은 못보내요."

성욱은 은수의 어깨를 잡고 일으켰다.

"우리 먼저 간다~"

멍하게 성욱을 바라보는 은수의 동그란 눈을 쳐다볼 생각도 않고 성욱은 은수의 어깨를 잡은 채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은수는 지하 2층을 누르는 손가락 끝이 길고 곧다고 생각했다. 한 두 번 보는 손가락이 아닌데, 처음 성욱의 집에 가던 날이 생각났다. 성욱이 크림을 떨구었던 손가락이었다,  나도 모르게 핥았던 그 손가락. 그 밤이 생각나서 은수는 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응? 또 토마토같이 됐네."

성욱은 은수를 내려다보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바로 돌려 눈을 맞췄다.

"무슨 앙큼한 생각을 했길래 빨갛게 됐을까?"

"아..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은수는 성욱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은수의 빨개진 볼을 바라보던 성욱은 지하2층을 알리는 소리에 은수의 허리를 감쌌다.


"데이트해야하니까 봐줄게요."

성욱은 은색 아우디 앞에 서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은수를 태웠다. 시리즈만 달라졌지, 7년 전이나 후나 아우디 사랑은 여전하네. 운전석에 앉은 성욱에게 은수는 불안한 듯 물었다.


"술 .. 마신 거 아니에요?"


성욱은 은수의 볼을 살짝 꼬집더니 시동을 걸며 말했다.


"걱정해 주는거에요?"


은수는 기가 찼다. 7년 후에는 술 처먹고 단속을 하도 걸려서 집에 차키도 뺏기고 그러니까 그러지.


"차 가져온 날은 술 안 마셔요."


"믿을게요. 운전 진짜 잘하신다."


차를 모는 손길이 능숙했다. 운전병이기까지 했으니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성욱이 그 스토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군대 때 운전병이기도 했고."


성욱은 군대 이야기 하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좋았었다고,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신이 나서 풀어놓곤 했다. 스물일곱의 성욱도 여전하구나. 은수는 두 세 번 씩 들어서 이미 다 외운 스토리를 또 부지런히 박수치며 웃어주었다. 성욱이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꼼꼼히 놀라주면서.


"우와, 그 후임이 장난친 거였어요? 북한군이 쳐들어왔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찍은거죠 뭘."


수다를 떨며 해안가를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은수는 성욱이 광안리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어제 은수를 올려보냈던 호텔 앞으로. 호텔 앞에 도착한 성욱은 은수를 빤히 쳐다봤다. 은수는 성욱의 눈동자에 비친 가로등이 불타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성욱은 말없이 은수의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맞춘 입술이 손등을 타고 손목으로 올라왔다. 은수는 익숙한 촉감에 등줄기가 아릿해졌다. 안돼.

"올라갈게요."

은수는 손을 훽 내리고 뒤돌아 최대한 성큼성큼 걸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웃고 있는 성욱이 느껴졌다.






성욱은 한참 차에 앉아 있었다. 왜 그냥 올라가지?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스무살 여자애가 나를, 최성욱을 왜? 밀당을 하는건가 싶어 화가 나다가도 스무살밖에 안된 여자애가 그정도의 참을성으로 성욱을 밀고 당길 수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보통의 여자들은 성욱과 밥 한 번 먹어보려고 1분이라도 더 이야기해보려고 눈을 빛내곤 했는데 은수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어딘가 불편해하는 기분, 마치 성욱이 그녀에게 단단히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사리는 것이 느꼈다. 처음 성욱을 만났을 때 많이 닮았다고 착각했던 그 남자 때문인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질투가 났다. 뭔데 그 남자는 대체.






호텔 방에 들어선 은수는 창 밖을 빼꼼 내다봤다. 성욱의 은빛 아우디가 한참을 서있다가 막 시동을 거는 것이 보였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매끈한 자동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수는 7년 전의 성욱을 마주한 몇시간을 되짚었다. 지금도 그 때처럼 유쾌하고, 잘 놀고, 여자가 좋아하는 포인트를 알긴 하는데, 예의 그 능구렁이같은 점이 없다는 게 어색했다. 은수는 언젠가 성욱이 술에 취해 늘어놓았던 넋두리가 떠올랐다.

"어떤 여자가 있었어"

성욱은 그의 오피스텔에서 여느때처럼 뜨겁게 마주 안은 후 은수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었다. 

"사랑해서는 안 될 여자였는데. 마음을 너무 줬던거야, 내가. 그 여자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몰랐지."

알콜향이 잔뜩 묻어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씁쓸함이 진했다. 

"사랑한 내가 잘못이었지. 그 여자의 마지막 말이 정답이었어. 사랑? 어차피 오빠도 변할거야.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그 이후로 사람을 믿는다는 게, 여자를 사랑한다는 게 참. 어렵네."






그 여자만 없었다면. 은수는 모자랄 것 하나없는 성욱을 되찾고 싶었다. 7년의 시간이 쓸어간 성욱의 순진함을 지켜낼수만 있다면. 핸드폰 스케줄러 상단에 뜬 2010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다, 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7년 전으로 돌아와서도 성욱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지금의 성욱을 지켜내고 싶었다. 이대로 사랑할 수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1. 7년 전 오늘,에서 맞은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