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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May 06. 2017

#3. 산 넘어 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 밝았다. 창문 밖으로 펼쳐진 하얀 모래알이 4월의 봄빛을 반사하며 화사하게 빛났다. 은수는 침대에 누워 폭신한 이불을 돌돌 말아 쥔 채 푸른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지점을 멍하니 바라봤다.

2010년 2010년.. 아무리 되새겨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스무살이라니. 너무 까마득한 옛날의 나이라 좋아해야할 지 싫어해야할 지도 알 수가 없었다.

클럽에서 확인해본 바로 폴 실력은 그대로 남아있으니, 어디서든 강의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모아둔 돈도 그대로고. 문제는 학교였다. 은수는 졸업한지 3년도 넘은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클래스넷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쳤다. 당연히 기억이 나질 않아 수 십번의 아이디 찾기와 비밀번호 찾기를 반복한 후였다. 익숙한 남색 화면에 1학년 1학기라는 창이 떴다. 1학기 때 수강했던 기초 교양 항목과 대여섯개의 전공을 보니 아득해졌다. 지금 다시 학교로 돌아가 1학년의 생활을 시작한다는 게 끔찍했다. 은수는 학과처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사무적이고 무미건조하게 전화를 받은 교직원에게 은수는 다짜고짜 용건을 이야기했다. 휴학할래요. 이미 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서 불가능하다는 설명들이 길어지기 전에 은수는 준비했던 패를 던졌다.


임신했어요. 휴학 좀 하게 해주세요.





잘 나갈 때 폴댄스 수업을 하며 모아두었던 통장의 돈이 그대로라는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날 아침 눈 떴을 때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은수는 집을 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매일 꼬박 꼬박 나가는 호텔숙박비가 아깝기도 했다. 보증금으로 모아둔 돈을 넣어두고, 다시 일을 해서 월세를 마련하면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앱스토어에 직방을 치려다가 그런게 있을리가 없지,하며 네이버에 피터팬을 검색했다. 다행히 10년도 넘은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커뮤니티는 2010년에도 성업중이었고 은수는 부산의 원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생각만큼 성에 차는 곳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을 던져 버리려는데 문자가 왔다.


[ 잘 들어갔어요? ]


성욱이었다. 이 인간이 왠 일이지. 당연히 그렇게 돌아가고 나서 연락을 안 할 줄 알았는데.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게 얼마만인지 까마득해서 하마터면 스팸인줄 알고 삭제버튼을 누를 뻔했다. 잠깐 고민하던 은수는 답장을 보냈다.


[ 네. ]


[ 아직 호텔이에요? ]


[ 네. 그런데 이제 방을 구해야 할 것 같아요. ]


너무 속이 보일까 싶어 망설였지만 은수는 용기를 냈다.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게 애가 탔다. 던진 미끼를 그가 덥석 잡아채 주기를 바랬다.


부산대 학생회실에 앉아 펜을 돌리다가 성욱은 또 문득 딴 생각에 빠졌다.


[ 도와줄까요? ]


성욱이 보낸 메시지에 은수는 애매한 답장을 했다.


[ 뭘요? ]


성욱은 약이 올랐다. 한참 어린데.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성욱은 자꾸 떠오르는 은수의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호텔 로비에서 한참을 기다리게 할 때는 언제고 잘 들어갔냐는 말에 방을 구해야겠다는 대답이라니. 어떻게 한 번 해보려는 여자들이 저 자취해요, 를 은근히 어필하는 것은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방을 알아봐야겠다고 말하는 건 또 무슨 심보인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 따위는 머리 써서 답하는 바운더리에 들어있지 않다는 건가?


[ 방 구하는 거 말이에요, 친구니까.]


도와줄까요, 라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무슨 속셈이야 대체. 호의를 베푼다고 믿어버리기엔 지금까지 알던 성욱은 항상 다른 속셈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믿는 순간 상처를 받았다. 친구니까, 라고 포장하는 다음 말에 은수는 불안해졌다. 성욱이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 이런 제안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었고, 성욱의 수법에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어쩌지.


[ 아는 사람도 없잖아요. ]


사실은, 믿고 싶었다. 그의 말이 순수한 인정과 호감을 기반으로 한 진심이기를 바랬다.

설마, 정말로 나를 도와주고 싶어서 그러는건가? 최성욱이 그렇게 순수한 면이 있다고?


[ 그래주면 고맙죠, 저야 ]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답장을 보낸 은수는 그대로 호텔 침대에 누워버렸다. 자꾸 기대하게 만드는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북하고 어색했다. 좋아하지만, 막상 또 7년 후처럼 상처만 받고 끝이 날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기를 바랬다. 너무 간절히 바라는 모든 일은 딱 그만큼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니까 기대조차 않아야 하는데.


[ 두 시간 뒤에. 괜찮아요? ]


네, 라고 답장을 보낸 후 은수는 화장대에 앉았다. 기대와 불안이 정확히 반반씩 묻은 얼굴로 은수를 바라보는 여자가 낯설었다.






로비 앞에 서 있는 성욱의 아우디를 흘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일신그룹의 막내아들 차에 오르는 여자가 맨 다리를 훤히 드러낸 핫팬츠 차림이라는 것에 수군대는 눈치였지만, 은수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 성욱은 은수를 바라보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분명히 다리가 어떻다, 이렇게 짧으면, 으로 시작하는 오만 드립을 다 쳤을텐데 말이 없으니 더 어색했다. 성욱은 말 없이 운전석에 걸려있던 자켓을 들어 은수에게 건넸다. 얼결에 자켓을 받아든 은수는 엉거주춤 다리 위에 덮었다.


" 고마워요. "


" 원하는 조건은 뭐에요?"


"네?"


" 일부러 그러는 건지 정말인지 모르겠네. 집 말이에요. "


" 음.. 그냥 크고, 높으면 좋죠. 햇살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고 꼭 방 앞에는 아니더라도 건물에 테라스가 있으면 좋겠고."


"그런 집들은 보통 아주 비싼데."


"열심히 일해야죠 뭐.."


"내가 아주 좋은 조건의 집을 몇 개 알아요."


"그래요?"


"해운대에 있는 오피스텔 가장 꼭대기층에요. 바닷가 바로 앞이라 뷰가 정말 좋고, 보안도 철저하고, 풀옵션이라 따로 들고 올 것도 없고."


"와 대박인데요?!"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으로 방을 구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로또라고 생각한 은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 좋은 건 보증금을 낼 필요가 없어요. 그냥 매달 월세만 50씩 내면 돼요."


보증금이 없다고? 그럼 3천만원의 돈으로 뭐든 생활할 수가 있다. 은수는 당장 일을 하지 않아도 조금은 이 여유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그런데 조금 걸리는 거 하나."

 

신호를 기다리며정차한 성욱은 눈을 동그랗게 뜬 은수를 바라봤다. 호기심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이 못 견디게 귀여웠다.

 

"집주인이 좀 깐깐해서 가끔 들를 수도 있어요."

 

은수의 눈썹이또 삼각형으로 모였다. 그런 게 어딨어.

 

“자주 들르지는 않을거에요. 그냥 점검. “

 

“일단 가서 볼래요.”

 

성욱은 말없이 볼륨을 올렸다.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라니, 오랜만에 듣는 명곡에 은수는 콧노래가 나왔다. 옛날에 진짜 좋아했었는데.

 

“ 이 노래 알아요?”

 

“완전 명곡이잖아요.”

 

“노래 잘해요?”

 

“그냥 그냥. 좋아하긴 해요.”

 

 성욱은 굳이 말을받아 치지 않았다. 서른 넷의 성욱은 두 번째인가 세 번 째 만났을 때 와인 바에서 사라 바렐리스의 gravity를 흥얼거리는 은수에게 노래하는 목소리가 궁금하다, 예쁠것 같아, 라며 뻔한 소리를 했었다. 반대로 ‘노래 잘해요?’라고 물어보았을 때 볼을 쓰다듬으며 ‘은수 눈에 눈물 한 방울 고이게 할 정도?’라고 대답했던 능구렁이가얌전하다는 것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따금씩 날이 참 좋네, 그러게요, 배는 안 고파? 그냥 그냥요, 따위의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대화들이 오갔지만 오피스텔에 도착하는 20여분의 대부분은 오디오의 음악소리가채웠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문을 열 수 있었을 때 은수는 막힌 숨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성욱이라니, 어색했다.

 해운대 영화의거리, 라는 사인이 보였다. 성욱은 1층부터 3층까지 편의점, 카페, 치킨, 꽃집, 병원 등편의시설이 한 눈에 캐치하기도 어려울만큼 다양한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깔끔한 주차장에익숙한 손길로 주차를 마친 성욱은 차키를 뽑고 은수를 바라봤다.

 

"내릴까?"

 

엘리베이터 문이열리고 성욱은 망설임 없이 17이라는 버튼을 눌렀다. 그위로는 버튼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우와"

 

은수는 입이 떡벌어졌다. 동그란 벽을 따라 파노라마같은 창 너머 해운대 바다가 펼쳐졌다. 신발을 벗고 창가로 가는 열다섯 발자국이 멀었다. 창가 앞 왼쪽에는소파가 반대편 벽에는 텔레비전이 놓인 협탁이 있었다. 소파 뒤로는 안락의자와 책장이, 텔레비전 옆으로는 침대가 딸린 방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서랍장과붙박이장이 깔끔하게 침실을 메웠다. 하얗게 리모델링 된 화장실의 수압은 알맞았고 따뜻한 물과 차가운물이 조절하는 속도에 맞게 착착 바뀌었다. 화장실문 옆으로 두어 발자국을 걸어가면 인삼빛 미니바겸 식탁이두 개의 식탁의자를 사이에 두고 빛났다. 냉장고와 세면대, 찬장이가지런히 요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찬장 안에는 냄비며 수저와 접시들이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지금 누가 살고 있나봐요?"

 

뒤를 돌아 성욱을바라보며 묻는 은수에게 한 발 다가서며 성욱은 답했다.

 

"음, 아니요. 은수씨가 그냥 써도 돼요."

 

"이걸 다요?"

 

풀옵션도 이런 풀옵션이 따로 없었다.

 

"최고에요..!"

 

은수는 상기된얼굴로 성욱을 바라봤다. 단번에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이 정도라면 집주인이 이따금씩 점검하러 와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이렇게 좋은 집을 고작 50만원에 쓰게 해줘서 고맙다고 커피라도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요?"

 

성욱은 눈을 빛내며고개를 부지런히 끄덕이는 은수의 볼을 쓰다듬었다.

 

"바로 계약하면 되겠다."

 

"그렇게 간단하게 돼요?"

 

"그럼, 내가 집주인이니까."

 

"성욱씨.. 아니 오빠가 이 집 주인이라구요?"

 

문득 성욱이 차안에서 말했던 조건이 생각났다. 이런 수법으로 대체 몇 명을 가지고 놀았을까. 이렇게나 잘나갔었나. 어리고 잘생겼겠다 집도 차도 있겠다 여자 깨나울렸겠구나, 아니, 울리고 있겠구나 생각하니 은수는 찌푸려지는눈썹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집 주인인 건 싫어?"

 

지금도 너는 모자란게 없구나, 급할 것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은수는 할말이 없어졌다. 성욱의 방 안에 서 있는 지금이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볼래요."

 

거절할 이유는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성욱의 수에 넘어가는 것은 내키지가 않았다. 은수는싱글거리는 성욱을 쏘아봤다. 얄미워.

 

“호텔로 데려다 주세요.”

 

호텔 앞에 내리자마자은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로비로 걸어갔다. 유리문 뒤에서 사라지는 성욱의 차를 확인하고는 가까운 PC방으로 뛰어갔다. 방을 구해야 해.피터팬에서 괜찮아 보이는 집들에 전화를 하고 부동산 몇 군데에도 전화를 걸었다.

 

“오늘 지금 당장 보고 싶어요.”

 

가장 가까운 곳부터광안리 곳곳을 구석구석 누비면서 은수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다섯 군데쯤 돌아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낮에 봤던 그 방만큼 마음에 쏙 드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정도 방은 보증금 5천 만원을 탈탈 털어놓고도 월 60만원은기본으로 넘었다. 관리비는 당연히 또 따로. 어떡하지. 게다가 막상 5천 만원을 보증금으로 넣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했다. 은수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호텔로 돌아오다 말고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샀다. 은수의 카드를 받아 든 캐셔는 카드 리더기에 몇 번 카드를 읽히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저.. 잔액 부족이라고 뜨는데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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