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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씨 May 12. 2017

#4. 내 일상에 너가 떨어졌어

황망히 카드를받아 든 은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돈이 없다고? 적금을깬 지 얼마 안되어서 5천 만원 하고도 몇 백 만원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국민은행 체크카드에 돈이 없다는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은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핸드폰에서 국민은행 어플을 찾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쳤다. 됐다, 로그인. 제발, 제발을반복하며 내 계좌를 클릭하는데, 야속한 하얀 창이 떴다.


[유효하지 않는 계좌입니다.]


? 왜 유효하지 않은 계좌야, 은수는 고객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근무 시간이 지났다는 말에 심장이 쿵 떨어졌지만 뒤이어 카드 분실 및 보이스피싱 신고만 가능하다는 안내에 은수는보이스 피싱을 반복했다. 갑자기 전 재산이 사라졌는데 보이스 피싱이지 뭐야 상담원이 연결되는 45초가 45년 같았다. 이름과부서를 설명하는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은수는 용건을 뱉었다.

 

"제 계좌가 없어졌어요."

 

"계좌가 없어지셨다구요? 제가 바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고객님의성함과 계좌번호를 말씀.."

 

"정은수, 91052290514 에요"

 

"바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은수는 손톱이자꾸 물어 뜯겨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말도 못하게 초조했다.

 

"죄송합니다만 고객님... 해당 계좌는 없는 계좌로 나옵니다.."

 

"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만든 지 7년도 지났는데 스무 살 되자마자 만든..!"

 

2010년이라서..? 은수는 애써 기억을 더듬어 처음 계좌를 만들었던날을 떠올려봤다. 날이 무더워서 은행문을 열고 들어서며 시원하다고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기다리는 동안 낯선 아저씨가 건네준 커피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었을 때 그 위에 동동대던 얼음과 첫 계좌신가봐요, 라고 친절하게 웃던 은행원의 팔뚝이 하얗게 빛나던 것도. 여름이었다.

아직 이 계좌는생성되지 않은 계좌라서, 라고 하는 말에 아니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제가 7년전으로 돌아와서요, 라고 한들 누가믿어줄까.

 

은수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너무어이가 없고 막막해서 눈물도 나오지가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렸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어질거려서 모든 소리가 고장난 라디오의 소음처럼 웅웅거렸다.당장 오늘은 어디서 자야하지. 어제 아침 혹시 몰라 뽑아두었던 10만원이 생각났다. 그걸로 호텔에서 또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성욱의 오피스텔이 생각났다. 오후까지는 자존심이 상해서 다시는 들어가지않을거라고 다짐했던 곳인데 지금은 하늘에서 떨어진 새 동아줄같이 느껴졌다. 은수는 연락처에서 성욱의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래요, 계약. 뭐어떻게 하면 돼요?"

 

성욱은 손목을들어 시계를 봤다. 저녁 7시 반이었다.

 

"오늘은 조금 늦었고.. 다음에 계약서를 들고 올게. 그 때 계약하고..."

 

"오늘부터 살고 싶어요."

 

침을 꼴깍 삼키고자존심을 구기는 말을 한 마디 덧붙여야 한다는 게 몹시, 싫었다.

은수는 괜히 더 새침하게 말했다.

 

“월세는 후불로, 다음 달부터 낼래요.”

 

수화기 너머 성욱의침묵이 은수의 숨을 막히게 했다.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때는 그냥 이 남은 10만원으로 서울로 올라가서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빌고 개과천선한 스무 살로 살아가야겠다,까지 생각했을 때 성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디야?”

 

“호텔 앞이에요.”

 

“광안리였지… 20분 정도 걸리겠다. 괜찮아?”

 

“네, 기다릴게요.”

 

쭈그리고 앉은은수 앞에 은색 아우디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섰다. 성욱은 은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을 보고 흠칫놀랐다.

 

“울었어?”

 

달려와준 성욱이고마웠고, 돈 한 푼 없이 2010년에 버려진 처지가 서러웠고, 울었어?라고 묻는 목소리가 잘 알던 따뜻한 목소리라 울컥해서 은수는참으려고 한 눈물방울을 삼킬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라고잠긴 목소리로 도리질을 하는데 눈물이 자꾸 떨어졌다. 성욱은 말없이 은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집에 가자.”

 

조수석에 은수를앉히고 오피스텔로 향하는 동안 성욱은 말없이 음악을 틀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멜로디에 묻혀 잦아들고몇 분 후 성욱과 은수는 낮에 올랐던 엘리베이터에 다시 올라 17층 앞에 서 있었다. 성욱은 도어락을 올리며 비밀번호를 보여주었다.

 

“0529. 비밀번호야. 기억할 수 있나?”

 

“그럼요.”


5월 29일. 성욱의생일이었다. 열 살 어린 여자와 길거리에서 마주치지만 않았더라면 은수는 어떤 선물로 성욱을 기쁘게 할지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으리라. 성욱은 묵묵히 문을 열고 은수를 들여보냈다. 은수는 신발장에 신발을 벗어두고 성욱을 돌아봤다.

 

“고마워요.”

 

문을 닫으려는은수에게 성욱은 물었다.

 

"커피 한 잔도 안 타주려고?"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그리고 집주인이잖아 나름. 은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수는 낯선 주방에서 괜히 더 부산스럽게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ON 버튼을눌렀다. 머그컵이며 믹스 커피며 심지어 라면까지 들어있는 이 오피스텔이 도라에몽의 가방처럼 느껴졌다. 한 푼도 없이 2010년에 남겨진 은수는 머그컵을 씻고, 닦고 믹스 커피를 뜯는 동안 안도의 한숨을 열 번도 넘게 내쉬었다. 움직이는손동작 하나하나에 내려앉는 성욱의 시선이 느껴졌다. 뭘 저렇게 쳐다봐 진짜.

 

"이제 어떻게 하나?"

 

은수는 또 그동그란 눈으로 성욱을 바라봤다. 성욱은 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을 마주할 때면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눈을 감기고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다시 물었다.

 

"방도 구했겠다, 계획이 있으니까 부산에 정착하려고 마음 먹은거 아니야?"

 

은수는 답답한 마음으로 창가를 바라봤다. 나는 다 알고 있는데 상대방은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기분이 참, 이상했다. 이해시킬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 상황을 어쩐담. 은수는 성욱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뭐 하는 사람인 지 알아요?"

 

성욱은 자기가묻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산 바닥에서 자기와 마주했을 때 이렇게 당당한 눈으로, 성욱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스무 살 꼬맹이가! 성욱은 입술을 깨물며 답했다.

 

“모르지. “

 

“얼마 전에 보셨으면서.”

 

무슨 말인 지모르겠다는 성욱의 표정을 보며 은수는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폴댄스 하는 거 봤잖아요. 저 나름 선생님이에요. 폴댄스 가르칠만한 곳을 찾아야죠.”

 

알다가도 모를여자네. 성욱은 은수가 엘룬에서 폴을 타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아래에서 열광하던 사람들만큼일지는 몰라도 순간, 저 여자를 알고 싶다는 강한 끌림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잘하네, 싶긴 했지만 강의까지 할 정도라니. 양파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까지 벗겨낼 수 있을까 상상하는 스스로가어색했다. 성욱은 애써 폴을 타던 은수의 모습을 지워내며 물었다.

 

“그런데, 은수는 나에 대해 궁금한 거 없고?”

 

은수는 소파에서일어서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문가 쪽으로 성욱을 안내하며 답했다.

 

“웬만한 건 다 아는 것 같은데. 제가 알아야 하는 다른 게 있나요?”

 

“아직 한참 많지.”

 

“하나하나 물어보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다행히 밤은 기니까.”

 

은수를 내려다보는속눈썹이 길고 짙었다. 수백 번도 더 입맞췄던 입술이 유난히 붉게 보였다. 은수는 재빨리 눈을 내리깔고 성욱의 두 팔을 잡아 현관문가로 살짝 밀었다.

 

“사실은, 피곤해서 안되겠어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한 마디를 마칠때마다 성욱을 문가로 한 발자국씩 밀어가던 은수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에서 한숨을 쉬며 현관문을열었다. 별 수없이 문가로 내쫓긴 성욱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문을닫다가 은수는 다시 반쯤 문을 열고 열린 틈새로 말했다.

 

“오늘도 고마웠어요.”

 

문을 닫고 은수는큰 숨을 내쉬었다. 그와 한 공간에, 단 둘이 있는 것은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너무나, 위험했다. 금방도 '사실은,' 이라고 운을 띄우고 그러니까 사랑하자고, 그를 조를 뻔 했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입을 부딪치던 성욱이, 나쁜 놈일지언정 그리웠다. 은수는 문득 7년 전에 빈털털이로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외로웠다. 이제어떡하지.






은수가 광안리해안가에 앉아, 성욱을 바라보며 그 남자와 판박이라고 이야기할 때 성욱은 은수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있었다. 신기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해운대만큼은 아니더라도음악분수 정도는 너끈히 담아낼만큼 깊고 큰 눈에 지치지도 않고 차오르는 눈물을 보면서 이렇게 서럽게 만든 남자가 자신을 닮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예쁜데 왜. 지연의 새초롬한 표정에 비하면 웃다가 울고 박수를 치다가 좌절하는 은수의 표현은 말도 못하게 풍부했다. 흑백 TV만보다가 컬러TV를 처음 본, 기분이었다. 성욱에게 지연은 가족같이 가까운 사이였다. 요식업과 엔터테이먼트업계를일신그룹이 꽉 잡고 있다면, 지연의  부모님은 부산패션계의 큰 손이었다. 지연은 종종 부모님이 운영하는 여러 브랜드의 광고 모델로 얼굴을 내비쳤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지연의 길고 곧은 팔다리며 하얀 살결을 칭찬했다. 지연의 부모님은 성욱의부모님과도 각별한 사이였던지라 둘은 어릴 때부터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성욱은 지연에게항상 익숙한 친절과 배려를 보였고 지연 역시 좋은 관계 유지의 표식을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욱의마음에 물보라를 만들어 내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성욱과 지연 사이의 암묵적 애정은 친구의 것 이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했었다. 바로 이 컬러 TV같은여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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