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욱의 오피스텔은 편안했다. 매트리스는푹신했고 사각사각한 이불 소리는 몇 번이고 몸을 감고 뒹굴게 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의 간질임이못 견디게 따사로울 때쯤 은수는 슬금슬금 일어나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얼떨결에 부산에 정착하게 된것까진 좋았는데 이제 어떻게 일을 해야 하나 막막했다. 잠깐 찾아봤을 뿐이지만 2010년 부산에 폴댄스 학원은 아무리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았고 또 온갖 커뮤니티를 뒤지며 수소문할 생각을하니 머리가 아팠다. 수업을 해야 돈을 벌 수가 있는데 학원이 없으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3차 함수를 앞에 둔 중학생처럼 답 없는 상황에 처하고 나니 칵테일 생각이 간절했다. 몰라, 내일 생각해야지. 은수는문득 성욱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성욱을 만났던 압구정의 칵테일바가 생생했다.
2016년 봄.
5월의 날 좋은 금요일 저녁, 평소 친하게 지냈던 오빠의 칵테일바 테라스에서는 은수의 생일 파티가 한참이었다. 친한 선생님들과 친구들, 매체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사람들과 그들의 지인이 한데 모여 왁자지껄한 자리에서 은수는 신이 났다. 몇 주 전부터 꼼꼼히 신경을 써서 꾸민 자리라 은수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곳곳에 놓인 갖가지 색의 장미와 조명들부터 흰색 테이블보가 길게 늘어진 테이블마다 올려진 치즈와 와인들도 은수가모두 맛보고 고른 메뉴들이었다. Coldplay의 음악이 흥겨운 비트로 믹싱되어 흘러나오는 믹스 셋도친한 DJ오빠들이 생일선물이라며 건넨 것을 몇 번이고 돌려 들으며 엄선한 것이라 흘러나오는 멜로디마다은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웃고 떠드는 축하의 자리에서 은수는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장미 날에 태어난 은수는 파티에 공통분모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장미’를 드레스 코드로 내세웠고, 그래서인지레드 포인트가 들어간 옷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오후 5시부터시작한 파티가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올수록 무르익어 갔고 테라스는 점차 북적북적해졌다. 졸업하고 꽤 오래 만나지 못했던 대학 동창이 샴페인을 들고 다가왔다.
“현호오빠!”
은수는 오랜만의 얼굴이 반가웠다. 학창시절부터파티를 좋아했던 사람. 졸업과 동시에 페스티벌 팀에 들어가 각종 락페스티벌을 기획하더니 지금은 팀장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사람이라 은수가 존경해 마지않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워낙 바빠서 자주만나지 못하는 얼굴인데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몹시 반가웠다. 건배를 제안하며 다가온 현호의옆에 처음 보는 얼굴이 함께였다.
“잘 지냈어? 더 예뻐졌네.”
별 소리를 다한다며 손사래를 치는 은수에게 현호는 옆에 있던 남자를소개했다.
“아, 인사해. 나랑친한 형이야.”
또렷한 눈매와 시원한 콧날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타일이 패션에 관심깨나 있는 사람이겠구나, 하는느낌을 주었다. 은수는 남자의 자켓 왼쪽 포켓에 달린 작은 장미 팬던트를 보고 웃음이 났다.
“안녕하세요, 드레스 코드 제대로 맞춰주셨네요.”
“알아봐주셔서 다행이네요,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다구요.”
“그러게요, 구하기 정말 힘드셨을텐데.”
성욱은 은수의 귓가에 다가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비밀인데, 유아동복 코너에 가니까 있더라구요.”
훤칠한 성인 남자가 아동복 코너에서 장미모양 브로치를 사는 모습을 상상하니웃음이 터졌다. 까르르 웃는 은수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남자는 은수의 귀에 한 마디를 더 남겼다.
“향이 좋네요.”
한참 웃다가 눈이 마주친 은수는 순간,남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칫 놀라 한 발 물러서는 은수에게 남자는깊고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둘이 이야기하고 싶어요.”
“연락 드릴게요, 성함이...”
은수는 남자가 건넨 명함에 적힌 이름을 힐끔 보고 말을 마쳤다.
“성욱씨.”
성욱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은수는 왼손을 뻗어 악수를 했다. 잡은 손의 세 번 째와 네 번 째 손가락께를 어루만지며 성욱은 아리송한 칭찬을 했다.
“참 예쁜 손인데, 손가락이 허전하네요.”
은수는 멋쩍게 웃으며 왼손에 힘을 빼고 악수를 마치려 했다. 은수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성욱은 생긋 웃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성욱이 사라진 후에도 건배를 권하는 손들이 많았다. 12시가 조금넘어갈 때쯤 파티쉐를 하는 고등학교 동창이 준비한 케이크에 초가 켜졌다. 믹스셋의 음악이 생일축하 노래로바뀌고 은수는 행복한 기분으로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고, 초를 불었다.
‘행복한 연애 좀 하게 해주세요.’
몇 잔을 부었던 지 생일 케이크에 초를 불자마자 은수는 아득하게 피곤해졌다. 클럽까지 가자고 끌어대는 선생님들의 손을 맞잡으며 다음 주에 꼭 가자고 새끼 손가락을 걸고, 남아있는 손님들에게 한 명 한 명 와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니 정말 당장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1층으로 내려와 택시를 기다리는 은수 앞에 까만 아우디 한 대가 서더니 조수석 쪽 창문을 내렸다. 몇 시간 전 시끄러운 라운지 안에서 언뜻 들었던 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어디 숨어있었어요?”
누구지? 갸우뚱하는 은수가자동차 문을 열 생각도 않자 남자는 운전석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한참 찾았잖아요.”
양복 왼쪽 포켓에 달린 자그마한 장미모양의 팬던트를 보니 생각이 났다.
“아, 그 아동복 브로치..”
“데려다 드릴게요.”
은수는 테라스쪽을 힐끗 돌아봤다. 다행히다들 흥에 겨워 쉽사리 내려온다거나 할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집에 간다고 나왔는데 왠 남자와 함께사라지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꽤나 창피할텐데. 일단 여기서 사라져야겠다 싶어 성욱이 열어주는 조수석에그대로 올라앉았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성욱은 말없이 차를 출발 시켰다.
“어디 가요?”
“저도 아직 잘 모르겠긴 한데..”
피곤함에 하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성욱을 바라보는 은수에게성욱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생일이잖아요.
“근데 저 너무 피곤한데”
“후회 안 할거에요.”
은수는 심드렁하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멀어지는 압구정의 야경이 창백하게 반짝였다. 깜빡, 또 깜빡이는 야경을 바라보다 한강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착한곳은 한강변에 세워진 3층짜리 레스토랑이었다. 정확히는 한강위에, 라고 말하는 편이 맞겠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한강쪽은 모두 깨끗한 통유리라 야경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한남대교가 한 눈에 들어오는 왼편 테이블로 걸어간성욱은 의자를 빼고 은수를 바라봤다. 은수가 의자에 앉고 나자 맞은편에 앉아 촉촉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는성욱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죠?”
“한강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숨은 예쁜 곳 찾아내는 거 좋아해요.”
메뉴판을 들고 온 웨이터에게 성욱은 ‘저는커피’,라고 말하고 은수를 바라봤다. 술은 더 이상 생각도하기 싫었기에 ‘저도요.’ 라고 말을 받았다.
“은수씨는, 폴댄서라고 들었어요.”
은수는 현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소개를 친절하게도 다 하셨구나 에고.
“네, 폴댄스 알고 계세요?”
“어휴, 모르는 남자가 어딨어요.”
성욱은 핸드폰을 꺼내 은수의 인스타그램을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제가 은수씨 인스타그램 알고 나서 일을 못하겠다니까요.”
성욱은 민망해 죽겠다는 미소를 띈 은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이었다.
“집중이 안 되어서.”
멍하니 또 은수의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는 성욱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으며은수는 창피해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만 봐요.”
“아니 왜요, 예뻐서 보는 건데.”
“알겠으니까 그만 봐요.”
“직접 보니까 신기하다.”
“네?”
“연예인 보는 것 같아요.”
은수를 빤히 쳐다보는 성욱의 눈은 호기심과, 끈적한 욕망과, 속을 알 수 없는 생각이 뒤섞여 있었다. 은수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깊은 우물 같이 까맣고 짙은 그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창피해요.”
은수가 두 볼을 감싸며 도리질을 할 때, 두 잔의 커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웨이터는 빠르고 조용하게 사라졌고, 다시 또 어색한 침묵이 둥둥 떠다녔다. 성욱은 커피잔을 들어 한모금 마시고는 빙긋 웃었다.
“맛있다.”
은수도 한 모금 맛을 보고 생긋 웃었다.
“네, 맛있네요.”
“은수씨, 웃을 때 예뻐요.”
뻔하디 뻔한 멘트도, 어떤사람이 어떤 목소리와 표정으로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은수는 피부로 체감했다. 예뻐요,라는 단어가 은수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옭아매어 성욱 쪽으로 당기는 것만 같았다.은수는 커피잔을 들어 따뜻한 커피를 속으로 들이켰다. 뭐로라도 이 쿵쾅댐을 잠재워야 했다. 성욱은 은수의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익숙하고 진지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 남자친구가, 있죠?”
은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요.”
“진짜 잘됐네.”
은수는 무슨 말이냐는 듯 성욱을 쳐다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에 각인되는 성욱이 위험할 만큼 잘 생겼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쳤어, 정말.
“이런 사람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떤 사람이요?”
“어리고, 예쁘고, 센스있고, 능력 있는, 은수 같은 사람.”
성욱의 칭찬은 각양 각색으로 끝날 줄을 몰랐다. 은수는 창피하면서도, 기분이 좋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잔이 모두 비워지고 한남대교를 오가는 소음이 한층 더 줄어들었을 때쯤, 시계를보니 어느덧 새벽 2시였다. 이 뭣도 아닌 수다로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니. 은수는 그새 피곤함도 잊고 있었다는 것에놀랐다.
“일어날까요?”
성욱은 일어서서 은수 쪽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은수는 눈 앞의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강의 레스토랑을 나와은수의 집까지 가는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은수는 이 새벽의 해프닝이 시작이 될지 에피소드가될 지 궁금해하는 스스로를 주책 맞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납치해서 미안해요.”
은수의 집 앞에서 성욱은 은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눈을 가까이 마주쳤다. 은수는 흠칫 숨을 삼켰다. 가까워지려는 입술에서 간신히 눈을 떼고아무것도 없는 차창 앞을 바라봤다.
“갑자기 납치당한 것 치고는 꽤 재미 있었어요.”
은수의 오른쪽 어깨에 걸친 팔로 볼을 쓰다듬으며 성욱은 말했다.
“다행이네요.”
“늦었어요. 들어가 볼게요.”
은수는 아쉬운 듯 빤히 바라보는 성욱의 눈을 느끼면서 어깨에 걸쳐진팔을 떼어내면서도 잘 하는 짓인가, 몇 번을 망설였다. 멀어지는성욱의 차를 보면서 은수는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내 소원의 해답이 될까, 상처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