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씨 Jun 30. 2017

#6. 왜 나를 그렇게 신경쓰는거에요?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은수는 빈 유리컵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7년 전으로 돌아와서도 성욱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성욱.최성욱.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바라보고 앉아있는 기분이 씁쓸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거람, 지금의성욱에게 나는 그냥 어쩌다 알게 된 불쌍한 여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은수는 스스로를 수없이 다그쳤지만 자꾸만 솟아나는 성욱의 얼굴을 지워내기가 힘들었다. 그냥은 안 되겠다 싶어 백화점으로 향했다. 뭐라도 바르고 걸치고입어보고 해야지 가만히 있다가는 먼저 성욱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할 것 같았다. 은수는 육중한백화점 회전문 안에서 클러치백 안에 든 핸드폰의 알림을 무음으로 바꿨다. 혹시나 모를 무언가를 기다리게되는 것이 싫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다. 립스틱을색깔 별로 발라보는 은수 옆에 붙은 판매사원은 2010년의 메이크업 트렌드를 열심히 설명했다.


"고객님 올 해는 자연스럽고 광택 있는피부표현이 완전 트렌드에요. 누디한 느낌으로 이렇게 연출하시고 진하고 비비드한 립스틱으로 입술에만 딱포인트 주시는 거. 이렇게."


2010년의 트렌드라지만 어째 몇 년 째 반복해들은 말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혹시 몰라 뽑아둔10만원이 은수의 전 재산이라는 것을 모르는 판매 사원은 눈을 크게 깜빡이며 비밀이라는 듯 말을 보탰다.


"이 색, 남자분들도 진짜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건 특급 비밀인데 고객님 너무너무 예쁘시니까 말해드려야겠다. 얼마 전에 그 일신그룹 막내 아드님도 선물할거라고 사가셨거든요."


은수는 머리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이 새끼를 진짜. 머리끝까지 분노와 배신감이 뒤엉켜 무의식중에 핸드폰을 꺼내는데 성욱으로부터 온 메시지가 첫 화면에 떠 있었다.


[ 푹 쉬었어? ]


뭐야 이건 또 이번엔 무슨 수작이람.


[ 네, 왜요? ]

[ 저녁은 먹었어?]

[ 아직. 오빠는요? ]

[ 먹어야지. ]


성욱의 문자는 애매했다. 문자를한다는 자체가 어색했다. 보통 전화를 하거나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다짜고짜 들이대는 게 성욱의 스타일이었는데이 애매함은 뭐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성욱답지 않았다. 뭐라고 답을 해야할 지 몰라 핸드폰만 잡고 서있는데 뒤이어 알림이 울렸다.


[ 저녁 같이 먹을래? ]


이 별 거 아닌 말이 뭐라고 시간 차를 두고 하는 건지,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수는 기분이 좋았다. 방금 전까지 립스틱을포장해갔다는 말에 확 속이 잡쳤던 건 또 잊어버리고.


[ 좋아요. ]

[ 7시까지 오피스텔 앞으로 갈게. ]


은수는 시계를 봤다. 6시 40분이었다.


[ 저 센텀 신세계에요. ]


온다고 해, 온다고 해라, 은수는 혼잣말을 하며 핸드폰을 또 붙잡고 있었다. 쓸데없는 자존심을부리고 있는 스스로가 황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고 쉽게 넘어가 주고 싶지는 않았다.


[ 더 가깝네. 도착해서 전화할게 ]


은수는 문자를 확인하기 무섭게 화장실로 뛰어가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단장했다. 유치해. 정신머리까지 스무 살로 돌아간건가. 그래도, 유난히 예쁜 것에 눈이 돌아가는 성욱의 성질머리를 알기에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마스카라를 덧바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백화점 앞에는 낯익은 은색 아우디가 반짝이고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고 앉은 은수에게 성욱이 일상적인 질문을 했다.


"배고프지?"


은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주면 좋겠다."

"뭘요?"

"너 자꾸 알면서 물어볼래?"

"정말 모르겠어서 그래요."

"저녁 말이야. "

"저 요리 못해요."

"난 잘 해."


아버지와 형들이 사업을 한참 일구어 갈 때 성욱도 함께 전국을 누비며맛보고 만들고 했었다. 이십 대 초반에는 가게를 오픈하면 한 두 달은 직접 음식을 만들고 내어 놓곤했다. 사장 아들과 함께 일한다는 긴장감이 오픈조에게 동기부여가 되었고 끈끈한 팀워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좋았다. 그 때 개발한 음식 중에 꽤나 히트쳤던 메뉴들도 있었다. 앤초비를짭쪼름하게 졸인 크림 파스타를 맛보면 은수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문득 성욱은 그 얼굴이 보고 싶어견딜 수가 없었다.


"계약 조건에 있었잖아 기억하지?"

"집주인이 원하면 쳐들어올 수 있다고 한거요?"


성욱은 피식 웃으며 다시 차를 롯데 백화점 쪽으로 돌렸다.


"장 보러 가자~"


쇼핑 카트를 끄는 은수의 등을 어루만지는 성욱의 손가락이 차가웠다. 손가락이 닿는대로 오소소 일어나는 소름이 2017년의 날들과 꼭같아서 은수는 애써 등을 휘며 몸을 피했다.


"그만 해요."

"왜? 예민해서?"


저 놈의 표현은 7년후나 지금이나 변한게 하나도 없네. 여자 꼬시는 것도 레벨업 좀 해야지 뭐 멘트가 저렇게 비슷해. 표정 변화도 없이 우유와 요거트를 집어 카트로 넣은 은수를 보며 성욱은 괜히 민망해졌다. 또 전처럼 빨개진 얼굴을 기대했는데. 은수는 못마땅하다는 성욱의표정을 살짝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돌아선 스스로의 입술에 걸린 미소를 부인할 수가 없었다.

장을 보고 오피스텔로 돌아오자마자 성욱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파스타를 준비했다. 익숙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자 은수는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


“와, 파스타 진짜 맛있네요.”


서른 번은 더 먹었던 앤초비 파스타였는데, 처음 입에 넣는 것처럼 맛있었다. 성욱이 만들어주는 파스타는 항상맛있었지만 은수는 그 중에 앤초비 파스타를 가장 좋아했다. 짭쪼름하면서도 얼굴이 찌푸려질만큼 짜지는않은, 딱 성욱의 농도가 있었다. 파스타를 바쁘게 입에 넣는은수를 바라보며 성욱은 새로운 이야기를 했다.


“지난 번에 말했던 그 거 있잖아.”

“어떤거요?”

“너가 하는 운동.”

“아, 폴댄스요?”


성욱은 폴댄스, 라는단어에서 마침 헛기침을 하며 물을 들이킨다. 은수는 진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였겠지, 천하의 최성욱이 부끄러워하는 게 있을 리 없으니까.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했었잖아.”

“네, 맞아요.”

“아는 분이 해운대쪽에서 센터를 이번에 새로 연다고 하시길래 너 생각이 났어.”

“정말요?”


2010년 부산에서 처음 문을 여는 폴댄스 센터라니! 상상만해도 신이 났다.


“괜찮으면 소개시켜줄게.”

“당연하죠! 정말 고마워요.”


오피스텔을 계약할 때도 보여주지 않던 한껏 상기된 표정을 폴댄스앞에서는 숨기지 않는 은수가 신기했다. 성욱은 은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엄청 좋아하나 보다.

아, 또 뭘요, 라고 물어볼거지?”


고개를 끄덕이는 은수를 보며 성욱은 말을 이었다.


“폴댄스 말이야. 그렇게 재밌어?”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거에요.”

“좋은 운동 많은데, 왜.”


은수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뭐야,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수작은. 서른 넷의 성욱이 자주 던지던 멘트가생각났다. 운동 중에 제일 좋은 운동은 둘이 하는 운동이라고,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몸에 좋다고 했던 말도 안 되는 그 멘트를, 백과사전에서 읽은 듯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배를 잡고 깔깔대는 은수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성욱은약이 바싹 올랐다.


“그렇게 재밌어?”

“속 다 보여요 진짜.”


한참 웃는 은수를 빤히 바라보는 성욱의 표정이 아리송했다.


“이렇게 웃을 때는 정말 애기 같은데,”


비워진 접시를 한 쪽으로 치우며 성욱은 말을 이었다.


“하는 말은 하나도 스무살 같지가 않아.”

“그래서, 싫어요?”

“싫은 건 아니고.”


아니고,는 뭐야. 조용한 방 안에 단 둘이 마주보고 앉아 눈을 마주치는 것이 불편했다.

아니, 언제나처럼 안겨 버릴까 봐 무서웠다.


“늦었어요.”


은수는 배시시 웃으며 일어나 접시를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설거지 해야겠다~”


뒤로 다가오는 성욱의 인기척에 은수는 힐끗 뒤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나 누가 쳐다 보면 설거지 못해요.”


은수의 볼을 꼬집으며 성욱은 못이기는 척 말했다.


“오늘도 내가 참아줄게.”


도리질을 하며 문간으로 밀어내는 은수의 팔을 잡으며 성욱은 신발을신었다.


“그래도 바래다 줄거지?”


흘러내린 가디건을 다시 걸치며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동안 은수도, 성욱도 말이 없었다. 은수는 자연스럽게 성욱의 손을 찾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까스로 잡아냈다. 가까이에있는 것이 못 견디게 좋으면서, 못 견디게 힘들었다. 운전석에오르는 성욱에게 은수는 손을 흔들었다.


“잘가요.”

“재밌었어. 아, 그리고 이거.”


성욱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더니 은수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적힌 세글자가 오후에 은수가 들렀던 브랜드와 꼭 같았다.


“뭐에요?”

“부산 입성 기념 선물.”

작가의 이전글 #5. 과거가 된 미래,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