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함께 있어도 외로운 시간들
1부 그림자 안에 사는 나를 만나다.
“엄마, 속상했겠네.”
나도 모르게 엄마를 위로하다 '아차' 했다. 수없이 들었던 시집살이의 신세한탄이 쏟아진다. 주변인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독했던 할머니,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늘 도망치는 아버지 사이에서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나를 여든이 가까운 요즘도 드라마를 쓰듯 풀어낸다.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말할 때마다 그들을 향한 분노와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엄마의 분노와 눈물샘이 나를 지치게 한다.
"그 양반들도 애썼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본능적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보호하고 힘 빠진 호랑이가 되신 아버지를 보호하고자 한마디 했다가 벼락 맞았다.
"네가 몰라서 그래, 내 말이 맞아"
" 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거야"
" 네 동생은 잘만 들어주는데 넌 성질도 못됐다."
“그 양반 얘기는 꺼내지도 마, 시끄러워.” 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신다.
나는 엄마와 함께 있으면 좋으면서도 조마조마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피곤함을 느끼곤 한다. 그때 피곤함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불안함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침묵이었다.
어린 시절,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점점 말이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예"나 누구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맞는 말"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대신 엄마에게 맞추는 아이, 세상이 원하는 아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엄마가 힘들어할까?’
‘이런 표정 지으면 엄마 기분이 나빠질까?’
저울질하면서ㆍ
처음엔
“나도 안아줘요.”
“내 얘기 좀 들어줘요.”
재잘재잘 내가 만난 세상 이야기, 내 마음속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꺼낼수록, 싸늘한 공기가 나를 감싸 안았다.
엄마의 얼굴이 굳어지고, 말이 짧아졌다.
그때 나는 배웠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귀찮은 아이가 된다.”
“사랑받고 싶다면, 참아야 해.”
그래서 나는 점점 사랑받고 싶은 마음도,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의 말도, 도움을 요청하는 말도 입 밖에 꺼내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하는 말은 꼭 필요한 말, 모두가 맞다가 칭찬하는 맞는 말 뿐이었다.
엄마는 장미꽃 같은 분이었다.
화려했고, 강했고, 당신만의 향기가 분명했다.
그 힘으로 엄마는 비바람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내셨다. 그 무거운 삶을 짊어지고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신 분이다.
그 힘겨움을 엄마는 표정으로 태도로 다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엄마는 감추려고 했는데 내가 예민해서 다 읽고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의 힘겨움과 엄마의 향기 속에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엄마에게 순종하는 거였다.
엄마의 감정은 변화무쌍했다.
맑았다가, 소나기가 내렸다가, 갑자기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나는 그 예측할 수 없는 날씨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늘 조심스러운 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진 웃던 엄마가, 내 말 한마디에 표정을 굳히거나, 숨소리가 달라지는 순간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내 숨소리를 줄였다.
점점 감정을 감추는 아이가 되었다.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살피고, 말을 줄이고, 항상 "괜찮아" 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얼음판 위를 걷듯, 항상 엄마의 기분과 태도와 표정을 살피며 조심조심 지냈다.
난 몰랐었다.
내가 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웠는지.....
그런데 지금은 안다.
그 외로움은
마음 안에 꾹꾹 눌러놓은 감정과 욕구들,
' 맞는 말'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자기 검열로 인해
표현되지 못한 마음들이 전해지지 못해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와 식사를 하다가, 내가 조용히 웃고만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말하고 싶은 건 많았는데,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입술은 굳은 채, 그냥 미소만 지었구나.
그럴 때면 느낀다.
엄마 앞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그 아이가, 아직도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걸.
엄마는 나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텃밭에서 기른 야채를 보내주고, 김치를 한 통 가득 담가 주시며,
“밥 잘 먹어야 해”라고 꼭 덧붙이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랑은 내 마음 깊숙이 닿지 못하고 휴~ 하는 한숨과 함께 날아갈 때가 더 많다.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 시절 엄마는 밥 굶기지 않는 게 사랑표현이었다면 나는 마음의 배가 고팠던 것이다.
얼마 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에게서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폭싹 속았쑤다'라는 드라마를 밤새워보면서 금명이 엄마가 우리 엄마 같고 내가 금명이와 닮아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금명이 엄마가 꼭 너희 엄마 같고, 네가 금명이랑 닮았더라.”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면도 있나 보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우리 엄마는, 딸들에게는 좀 무심했어.
그리고 나는 엄마를 애틋하게 생각하진 않아.”
그 뒤에 숨겨둔 진짜 문장은
“금명이와 달리 난 사실, 엄마랑 함께 있으면 좀… 불편해.”였다.
그 말은 꾹꾹 눌러 삼켰다.
나를 떠올리며 전화를 걸어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서,
엄마의 서툰 사랑을 지금은 이해하게 되어버려서.
또 다른 금명이 수진 씨
상담실에서 만난 수진 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가족 모임이 끝나면 돌아오는 길이 기운이 빠지고 마음이 무거워요.
웃고 떠들고 돌아왔는데, 마음이 허전하고, 몸도 무거워요.”
눈 빛에는 슬픔이 담겨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나는 수진 씨의 마음에 닿았다.
"외로웠겠어요....."
그녀의 엄마는 화장품 장사를 하셨는데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 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잘 가르치고 싶었고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엄마의 가르침을 담은 말들이 수진 씨에게는, 마음에 닿아 교훈이 되기보다는 툭툭 날아드는 가시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왜 그렇게 웃는 게 어색하니?”
“말 좀 똑바로 해, 답답하게.”
“그 옷은 도대체 누가 사 입었대?”
"김치는 처음 젓가락 닿으면 그냥 가져다 먹어!"
수진 씨는 엄마의 말들에 짜증을 냈지만 마음은 점점 움츠러들었고, 결국에는 말을 줄였고, 마음도 굳어가고 있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고 오면 한동안 불안해요. 그리고 모임도 불편해서 자꾸 도망치고 싶어요. 엄마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는데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고 세상이 무서운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랑 오래 있으면 그 사람이 언제 변할까 봐, 내가 먼저 긴장하게 돼요.”
그녀는 안다.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런데 그 사랑이 머리에서 멈춰있고 마음까지 전해지지는 못하고 바람에 날아가 버린 듯하다고 했다.
관계 속의 외로움
엄마 옆에 있으면 수진 씨도 나도 그런 기분이었다. 편해야 할 존재인데, 곁에 있을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은 여전히 긴장된다.
엄마를 사랑하고,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있으면 어느 순간 숨이 막힌다. 그건 엄마가 싫어서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날씨 속에서 내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감정이 연결되지 않았던 그 기억은 지금도 나의 다른 관계에 영향을 준다.
말을 할 때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되고, 내 감정을 꺼내는 게 어색해졌고, 그래서 더 외로워졌다.
내 감정이 닿지 않는 대화 속에서, 나는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고, 진짜 마음은 늘 혼자서 삭히게 되었다. 아니 어느 날부터인가는 나마저 내 마음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있었다. 엄마가 원하지 않는 세상이 원하지 않는 마음은 습관적으로 감추고 세상과 엄마가 원하는 모습은 자꾸 강화되고 있었다.
조건부 수용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는 이를 ‘조건부 수용(conditional regard)’이라고 했다. 사랑받기 위해 자기감정의 일부를 포기하고 ‘괜찮은 아이’, ‘문제없는 아이’로 살아가는 것. 아이에게는 생존 방식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침묵하게 만든다.
나를 다시 만나는 시간
지금 나는 그런 나를 다시 살펴보는 중이다.
누군가 앞에서 갑자기 말이 멎는 순간,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그 순간마다
“왜 나는 또 피하려 했지?” 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 끝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조용히 속삭인다.
“나는 무서웠어.
그 말이 아팠어.”
나는 이제, 그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
아직도 눈치를 보는 그 아이에게 따뜻하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이제는 내가 너를 이해해.”
당신에게
혹시 당신도 가까운 사람과 함께할수록 더 외로워졌던 적이 있나요?
그 외로움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이 달라서 마음이 연결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천천히, 그 기억을 꺼내어 당신 안에 남아 있는 그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서
그 모습도 사랑이었다고 알려주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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