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사 2차 시험 D-Day

by 작꾸천치

2차 시험날이다. 장소는 한양대. 전날 잠을 전혀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워, 무거운 마음으로 시험장소로 향했다. 컨디션이 최고조에 있어야 시험당일인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이렇게 해서 시험을 볼 수 있을까. 지하철을 타고 시험 장소로 가는 내내 오늘만 지나면 시험공부에서 드디어 해방이다라는 기쁨보다는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도착한 곳은 시험 장소가 아닌 한양대 근처 PC 방이다. 2명의 선배들을 만나고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관세사는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리고 과감히 포기를 했다. 다음 대책이 없었다. 부모님께 차마 포기했다고 쪽팔려서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4학년 2학기 복학을 해야 하고, 준비된 것은 없고, 취업은 해야 하고. 그래서 지난 몇 개월은 철저한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관세사 2차 시험준비에 집중을 하는 척, 속으로는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다시 한번 포기를 했다는 사실로 내 자존심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것의 혹독한 대가로 아무것도 없었던 3년 전 군에서 제대했을 당시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한 상황이었다.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편입이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고, 방향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희망도. 목표도.




한양대 근처 PC방의 문을 열자 익숙한 꽤꽤한 냄새와 컴퓨터 팬 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시험이 시작되는 9시보다 일찍 도착했기에 아직은 한산했다. 구석자리를 골라 앉으니 PC방의 푹신한 의자가 비겁한 도망자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형벌 같은 가시 방석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모니터를 켜고 로그인을 하면서도 내 손가락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게임 화면이 떠올랐지만, 내 눈은 자꾸만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PC 방에서 고뇌에 찬 20대 청년.png


9시 정각. 이제 시험이 시작됐을 시간이다. 지금쯤 감독관이 시험지를 나눠주고 있겠지. 심장이 묘하게 쿵쾅거렸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는 몸에서 나오는 강력한 항의 같았다.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지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너무나 낯설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게임을 켰다. 클릭 소리가 귀에 들릴 듯 크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게임에 몰입해 있지만, 나는 계속해서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 첫 번째 문제를 풀고 있겠지. 게임 속 캐릭터는 죽고 또 죽었다. 집중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배는 고팠지만 식욕은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 컵라면을 주문했다. 지금쯤 시험장 밖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을 사람들.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긴장을 풀고 있겠지.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PC방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졌다. 학생들, 취준생들, 직장인들. 그들 모두 자신의 이유로 이곳에 있겠지만, 나만큼 비참한 이유로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비겁한 나에게 던져지는 비웃음처럼 들렸다.


시계는 무심하게 3시, 4시를 지나갔다. 이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겠군. 손목은 마우스를 잡고 있지만, 마음은 시험장에 가 있었다. 허상의 시험지를 풀고 있는 나, 답안을 작성하는 나, 마지막 종이 울리기 전에 서둘러 정리하는 나. 실제로 경험하는 것처럼, 상상 속에서는 모든 과정이 생생했다.


4시 30분. 이제 곧 끝나겠군. 가상의 타이머가 내 머릿속에서 초읽기를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험이 끝난다는 해방감이 아니라, 이제 이중생활이 끝난다는 두려움이었다.


5시. 시험 종료 시간. 피부가 찌릿하게 전율했고, PC방의 형광등 불빛이 갑자기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8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온몸은 시험을 치른 것처럼 녹초가 되었다. 게임 화면을 끄고 결제를 위해 카운터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던지.




"오늘 오래 계셨네요"


난 오늘 처음인데,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PC방 사장님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한마디로 내 기분이 상했다. 내가 PC 방에 있던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킨 것 같은 뭔가 죄를 지은 느낌. 그는 내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서 온종일을 보냈는지 알 리 없다. 시험을 피해 도망친 비겁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거구, 게임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의 초라한 하루를 목격했다는 것도 몰랐을 거다.




PC 방 밖으로 나오며 잠시 기다렸다가 완벽한 범죄를 위해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수험생들의 대열에 슬쩍 합류를 했다. 혹시 누구에라도 내가 시험을 보지 않은 사실을 들킬까 봐.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성취감? 해방감? 아니면 나처럼 실패의 그림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적어도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지하철로 향하는 길에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게임 속 가상 세계에서 현실 도피를 하며 보낸 하루. 그 어떤 날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웠던 8시간의 시간. 그렇게 나의 2차 시험날은 시험장이 아닌 PC방에서 끝이 났다. 이런 인생의 코미디가 또 어디 있을까. 관세사 시험을 준비한다고 2년 가까이를 투자했는데, 정작 시험장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부모님께 거짓말을 한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아들이 무책임하게, 바보 같이 관세사 시험을 포기했다는 말보다는, 후에 시험결과가 나오고, 당연히 합격자 명단에는 이름이 없겠지만, 그래도 아들이 시험에 떨어졌지만, 좋은 경험을 했고,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렇게 하나하나 인생을 배워가는 중이라고 알고 계시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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