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순식간에 흐른다. 누군가의 시간은 넉넉하게, 누군가의 시간은 옹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시간은 잔인하고 고통스럽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누군가는 결코 줄지 않는 시간으로, 누군가는 눈깜짝할 시간으로 체감하는 데는 그 당사자가 시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
오죽 시간을 마술사, 혹은 사기꾼이라고 말할까.
나의 시간들 중 가장 느리게 흘렀던 시간은 아버지와 보냈던 시간들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장 짧았고 가장 아쉬웠던 시간이었음에도 아버지가 눈앞에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했을 당시의 시간들은 민달팽이의 움직임만큼이나 느리고 답답하고 찐덕찐덕하고 개운하지 못하고 지저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절에 와 떠올려보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아쉬운 시간들이다.
눈부시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모두 그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술취한 아버지의 비포장도로 위를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몇 가지 되지 않는 살림살이를 사사삭 감추느라 분주해졌던 젊은 엄마와 철없던 사남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살아서 뛰고 있다.
추수를 할 무렵부터 떫은 맛이 가시고 단맛이 돌기 시작하는 단감을 하나라도 더 얻어먹기 위해 작게 말아 이어준 볏단을 머리에 올리고 까실한 낱알이 목을 간질이는 순간을 참으며, 이제 겨우 예닐곱 살 먹은 나는 아버지의 지게 진 뒷모습을 따라 기우뚱기우뚱 걸어 개울을 지나 몇 번이고 반복해 걸었다.
엄마도 나도 그 놈의 술이 문제라고 모든 탓을 죄 없는 술에 묻으며 술만 입에 대지 않으면 세상 없이 다정했던 아버지를 곱씹고 곱씹고 장단을 맞춰, 술꾼 술꾼 하며 죽은 아버지를 놀리며 그리움을 험담으로 바꿔치기 하곤 했다.
부쩍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슴에 자꾸 박히는 것은 나이 때문이기도 할 테고, 요즘 한창 영혼의 생장점을 쑥쑥 올리고 있는 삼남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침 일찍 등교를 하는 막내에게 정신없던 어제의 일로 오래 냉장고에 두었던 생크림 케잌 한 쪽을 건넨게 문제가 되어 배앓이를 하고 결국 등교를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탓도 있고, 열다섯 살이 된 아들이 가출인 듯 오랜 시간 산책을 다녀온 후유증으로 제대로 한 대 얻어맞아 버린 반려 때문이기도 하고, 가만히 생각하면 이제는 이 혼란한 때도 어느 결에 훌쩍 지나가 버려 북적북적 정신없는 집안이 텅 비게 될 것을 미리 본 듯도 해서일 것이다.
정신줄을 아주 놓기 몇 해 전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그랬다.
힘들쟈? 서이나 낳아서 요즘 같은 세상 어찌 다 키울 거냐. 대학 등록금만 해도 솔찮할 틴디.
그랬다. 아버지도 셋째를 낳은 날 그 녀석들의 대학등록금을 어찌 감당하려고 아무 생각없이 그리 애를 낳았느냐 한숨을 내쉬었다.
멀고 먼 시절일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목전이다. 하수상한 세월이 이토록 빨리 흘러가 버릴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내 나이가 벌써 열세 살 나를 남기고 떠난 내 아버지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인생에 매달릴 것이 과연 무엇인가 자꾸자꾸 묻게 된다.
반려는 열다섯 살 아들이 빈 다섯 시간 동안 온 우주가 텅 빈 듯했다고 한다.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들었던 한 생명이 그 문제를 모조리 안고 집을 비워 주었으나, 문제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아이가 주었던 모든 행복과 사랑과 평화가 함께 사라져 버렸더란다.
나는 등 뒤를 돌아봤던 순간의 그 공허함과 텅빈 공간에 가득한 그 한 사람이 남기고 사라진 헛헛한 모든 게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 같았다. 붙들 것도 없으나 붙들고 살아야 하고, 붙든다하나 떠나가면 어찌할 수 없는 법.
미안하다. 어머니가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는데 빈 속으로 보내지 말아야지만 생각하느라 케잌이 며칠 째 있었는지 잊었어.
괜찮아요. 좀 자면 괜찮을 거예요.
병원에 앉아 대기하며 막내에게 사과를 했다.
어제 아버지도 오빠도 변화를 겪기 위해 그런 날을 보냈나봐. 두 사람 다 이번 일로 좀 달라질 거겠지.
그러겠죠.
그래도 넌 아버지가 있잖아. 나는 너만할 때 아버지가 없었어. 그래서 너네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힘들 때도 있겠지만 금방 지나가 버려. 이런 일들도 나중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될 거야. 아버지 엉엉 울었다고 놀리게 될 거야.
그러니까요. 아버지는 우리집에서 제일 연약한 사람이에요.
오빠가 제일 강한 거 같애.
그렇죠. 멘탈이 정말 갑이에요.
무엇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려면 부서져야 한다. 파괴되어야 하고 새살이 돋으려면 상처도 입어야 한다.
우리 가족은 이 또한 지나가는 순간 속에서 열심히 자라고 있다.
모두의 가정에 이 같은 변화가 덮칠 때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놓치지 말고 변화를 겪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