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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슝이모 Apr 19. 2022

이번에 내리실 정류장은 ‘태국’입니다

나는야 태국의 한국어교사

1. 

한국의 봄은 엉큼하기 그지없다. 올 듯 말 듯 봄은 꾹 다문 푸른 망울 속에 갇혀 도통 나올 것 같지 않더니 4월로 들어서자마자 아파트 정원에 노랗고 흰 꽃망울이 터지고 있다. 은근슬쩍. 갑작스럽게. 

꽃망울이 터지는 모습에는 중력을 거스르는 신비로움이 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조카아이의 견해를 빌리자면 봄이 꽃망울 안에 들어가 그간 못 뀐 방귀를 몰아서 껴대는 형국이다. 파방팡팡!


올해는 부지런히 봄의 꽃과 새싹과 기운을 즐기려한다. 그간 한국에 있지 못해 혹은 한국에 있어도 밤낮없이 일하느라 즐길 여력이 없었던 상황을 만회도 해야겠고, 때마침 나는 백수이고, 한국의 봄은 어찌나 짧은지. 

고국에서 맞이하는 이번 봄은 내게 애틋할 것이다. 

애.틋.할. 

과거나 현재형에 어울릴 형용사에 미래형을 부여하는 건, 정말 그럴 거니까. 다가오는 5월, 나는 한국어교사의 자격으로 태국으로 떠나 살게 예정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과는 거리가 멀어 주저했던 새로운 도전이 응답을 받았다. 하고 싶다는 열망에 마음과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나 할까. 


물론 나의 인생은 계획했던 대로 흘러온 모범생 인생은 아니었다. 난 결국 나사(NASA)에서 밤을 낮 삼아 일하는 칼 세이건의 후예가 되지도(청소년기의 계획), 캄보디아에서 안젤리나 졸리의 명성과 자웅을 겨루는 셀럽이 되지도(청년기의 계획) 못했으니까(뭐 이 정도의 소원쯤은 누구나 있지 않았나요?). 

그러나 소소한 관심에서 시작된 도전 앞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내 이력이 그 운을 말해준다. 천문학 잡지기자, 인도 여행 가이드, 해외원조사업 현장 활동가로 살았던 캄보디아에서의 삶, 네팔에서의 삶, 라오스에서의 삶. 

관심이 진심이 된 내게 찾아온 호사들이다. 비록 물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호사라 가족들의 호응이 늘 아쉬웠지만 적어도 나는 내 호사들을 존중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 응답받은 또 다른 계획, ‘태국의 한국어선생님’이라는 호사를 미리 만끽하는 중이다. 한국어 교사라니. 그것도 내가 살아보고 싶었던 태국에서!


‘귀하께선 최종 합격하셨음을 알려 드립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합격 메일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입을 틀어막았다. 최종 합격을 알리는 메일에는 합격 통보 문장 아래 추가로 요청하는 서류 리스트들로 빼곡했지만 내 동공은 오로지 진한 글자체로 된 ‘최종 합격’으로 가득 찼다. 해냈다는 성취감, 새로운 경험을 앞둔 흥분. 심장박동이 기분 좋게 빨라졌다. 

누구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지? 부모님? 동생들? 어떤 친구부터 이 소식을 알려야 할까?

이 기쁜 소식을 알릴 생각으로 들뜬 기분을 만끽하던 중 문득 불안해졌다. 너무 기뻐서 동네방네 알리는 내 모습에 하늘이 꼴사납다며 이 기회를 훅 날려버리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인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한동안은 혼자 이 기쁨을 얌전히 즐길 시간을 갖자. 마지막 관문이 될 신체검사 결과까지 나오고 나면 이 즐거운 소식을 주변에 나눠야지.


2.

 태국은 한국어와 매우 친밀한 관계가 있는 나라다. 한류 영향과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노동자들 덕택이기도 하지만, 태국 학교들이 정규 과목으로 너도나도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한 이유가 가장 크다. 심지어 태국 대학 입시 과목 중에도 한국어가 있다. 이렇게 태국 학생들에게 한국어 과목이 중요해지면 태국학교에 필요한 건 뭐다? 한국어 원어민 선생님! 그래서 우리의 교육부는 매해 한국인 한국어교원을 선발하여 태국으로 파견하고 있다. 한국어교원의 자격은 국어기본법에 의한 한국어교원자격증 2급 이상 소지자이다.  

   

교육부의 한국어교원 태국 파견 사업을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일하던 무렵이었다. 아침 8시부터 4시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긴긴 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강변 산책을 하고 와도 산적한 시간은 늘 버거웠다. 밤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고 싶은 마음과 침대 매트리스와 혼연일체가 되는 게으름이 서로 충돌하고 있을 즈음 발견한 한국어교원의 태국 파견 기사에 눈이 번쩍 띄었다. 일에 대한 한계와 자책에 이불킥이 잦아지던 무렵이어서 직종을 바꾸고 싶었고, 타문화에서 사는 형태는 계속 유지하고 싶었는데 태국의 한국어교원이라니, 두 가지 바람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한국어교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장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필수 자격은 한국어교원자격증 2급 취득자. 그렇다면 한국어교원자격증 2급은 어떻게 따야하나. 친절한 지식인께서 사이버대학의 한국어교육과가 있는 3학년으로 편입해서 학위를 이수하라는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2년이 필요한 장기프로젝트지만 이과생인 내가 생소한 어문계열 수업을 착실하게 들으며 한국어의 지식을 쌓기에는 적절한 시간이다. 게다가 내게는 쇠털같이 하고많은 캄보디아의 긴긴밤이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내가 태국의 한국어선생님으로 되기 위한 지난한 역사의 첫 발걸음이다.


사이버대학을 졸업을 하고 한국어교원 자격증 2급을 딴 건 2018년 여름. 졸업과 동시에 바로 한국어교원에 도전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용기 부족. 중년의 나이에 한국어교육 경력도 없는 나를 과연 누가 한국어교원으로 뽑아줄까 겁이 났다. 소심한 개복치 마음으로 일 년을 보내고, 또 일 년을, 그리고 또 일 년을 흘려보냈다. 해가 거듭되는 만큼 내 나이도 정직하게 묵직해졌다. 올해 초. 새로운 나이를 셈해보니 지천명이 코앞이다. 어느새? 위기감이 엄습했다.

‘이건 아닌데. 도전도 안 해보고 지레 겁먹다니, 한심하다 한심해. 내가 딸린 자식이 있어, 남편이 있어. 무조건 도전해보자. 그리고 안 되면 다시 해보면 되지. 인생 뭐 별거 있어? 더 나이 들면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


새출발을 작심한 임인년의 새해, 나는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매해 3월마다 모집하는 태국 파견 한국어교원 사업을 기다려 첫 도전을 했고, 봄꽃이 터질 무렵 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에헤라디야~ 새로운 삶을 앞둔 설렘은 이토록 달콤하고 아찔하기 그지없구나. 

기다려라, 태국! 이 몸이 곧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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