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슝이모 Jun 04. 2022

태국에선 채식해도 괜찮아.

태국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

1.

“선생님, 오늘 점심은 뭐 드실래요?”

펜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보통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

“어제는 카오팟(볶음밥)을 먹었으니 오늘은 팟타이를 먹을까 봐요.”

보통은 팟타이, 어쩌다 카오팟. 매일 식단이 바뀌는 태국 교사들은 내가 먹는 음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 태국 교사가 태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팟타이만 먹더라는 증언을 하자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친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에 팟타이를 먹는 태국인 교사를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 직장인들이 점심시간 식사메뉴로 굳이 떡볶이를 택하지 않는 현상 같은 건가.

태국 음식 중 아는 음식이라곤 팟타이 정도밖에 모르기도 하지만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걸 어쩌랴.

한국의 태국 음식점에서는 상상 불가한 착한 가격(1,000원~1,500원 사이)에 맛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맛나는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팟타이가 먹고 싶어 진다.)

팟타이는 이상하게 에어컨이 나오는 그럴싸한 음식점에서 시키면 맛이 반감된다. 노점상 주인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커다란 웍(wok)에서 요리조리 볶아지는 면을 직접 눈으로 보고 먹어야 제맛이다. 면을 볶을 때 섞이는 태국의 습한 바깥공기도 맛에 풍미를 더하는 것 같다.


태국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의 점심시간은 딱 정해져 있지 않다. 수업시간표에 따라 비어있는 시간에 알아서 먹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월요일에는 1, 2교시(8시 20분 시작, 10시 10분 끝)에 수업이 있고 그다음 수업은 5, 6교시(오후 12시 시작, 1시 50분 끝) 수업이다. 그러니 점심을 먹으려면 3, 4교시에 먹던지 아니면 오후 1시 50분 이후에 먹어야 한다.

내 수업 스케줄은 12시부터 시작하는 5교시 수업이 월요일에만 있지만 어떤 교사는 한 주에 3번 이상 5교시 수업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선 12시가 점심식사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학교 교사들은 점심 식사를 보통 학교 안 카페테리아에서 해결하거나 학교 밖 음식점에서 사 와서 교무실 옆 교사 휴게실에서 먹는다. 물론 도시락을 직접 싸오는 부지런한 교사들도 있다.

해산물까지만 먹는 채식 지향 주의자(페스코 베지테리안)인 나는 육고기가 든 음식만 파는 학교 안 카페테리아 이용은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학교 밖에는 노점 음식점들이 여럿 모인 큰 시장이 있어서 육고기 없는 음식을 조달하기가 편리하다.      

채식을 시작한 건 16년 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인도 여행에서 만난 도시 '푸쉬카르'는 채식 마을에서 받은 기운 탓이었다. 동네 전체에 채식만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마을 안 그 어디에서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채식하는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어서 그런지, 사막 위 호수 하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 마을에서는 소란이라는 것이 없었다. 덩달아 여행자들도 차분해졌다. 생명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잔잔한 울림을 받은 그때 결심을 했다.

왜 나라고 채식인으로 살지 못하겠어!

그 후로 10년을 달걀과 유제품까지 먹는 채식주의자(락토 오보 베지테리안)를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락토 오보 베지테리안으로 살았다고 하기엔 탄수화물 그러니까 빵 섭취량만 급격히 늘어나는 편식 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너의 시체는 빵 방부제 때문에 썩지도 않을 거라는 친구들의 우스갯소리가 진지하게 들리기 시작하던 6년 전부터는 해산물까지 먹는 채식 지향 주의자로 전향했다.   


2.

펜 선생님과 점심 시간대가 겹쳤던 어느 날, 그날은 같이 실내 음식점에서 먹고 오기로 했다.   

함께 간 음식점은 이슬람 사람이 주인인 곳으로 다른 음식점보다 음식의 매운 강도가 훨씬 덜해서 나같이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에게는 제격인 곳이다.  

 보통 태국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킬 때는 맵지 않게 해 달라는 말을 사정하듯 두 번 세 번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음식 어디에나 들어가는 태국의 작고 빨간 고추의 위력에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는 일이 발생할 테니까.  

그날도 고민 없이 팟타이를 시켰고 함께 간 펜 선생님은 돼지고기덮밥을 시켰다.

우리 옆 테이블에서 펜 선생님을 보고 알은 체를 했다.

“오, 우리 학교 수학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세요.”

체육복을 입고 있으니 누가 봐도 체육 선생님인 줄 알겠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한 안경을 쓰고 짧게 자른 머리가 인상적인 여성이다.  

수학 선생님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화려한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블라우스 색과 비슷한 화려한 네일아트를 한 손을 들어 흔들며 내게 인사를 한다.

서툰 태국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펜 선생님이 내게 두 교사에 대한 사적 정보를 하나 알려준다.

"두 사람은 커플이에요."

"커플? 무슨 커플이요?"

"사귀는 사이라고요."

태국 사람들은 동성 커플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소개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태국에서 동성 결혼은 법적으로 허용되지는 않지만 실제 혼으로 사는 동성 커플들이 흔하다. 펜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도 함께 사는 교내 동성 커플 교사들이 여럿 된다고 덧붙인다.  

      

그 말에 얼마 전 복사실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필리핀 영어교사가 떠올랐다.  

태국에서 4년째 영어를 가르친다는 그는 이목구비(구비는 이날 마스크로 인해 알 수 없었지만 그 후 식사 시간에 알았다.)가 아주 뚜렷하고 얼굴에 소년 미가 남아있어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동안의 소유자다. 성격이 매우 유쾌한 그는 나와 서로 통성명을 하자마자 사교성이 다분한 목소리와 몸놀림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혼은 했어요?”

“아니요. 선생님은요?”

“오우, 저요? 저, 얼마 전에 약혼했어요!”

그가 손을 들어 손가락에서 번쩍이는 금반지를 보여주면서 말을 잇는다.

“내 남자 친구가 영국 사람이라 영국에서 살아요. 그래서 내가 지난겨울에 영국에 가서 약혼을 하고 왔어요. 반지 멋지지요? 마음껏 축하해줘도 돼요.”

그가 얼마나 행복한 목소리로 말하는지 나 또한 기분이 좋아져서 처음 본 그를 향해 호들갑스럽게 손뼉 치며 축하해주었다.

 

다름을 포용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넉넉한 품이 부럽기까지 하다.


3.

학교 근처 시장에서 채식음식점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시장을 몇 년간 다닌 펜 선생님은 자기 눈에는 이곳이 보이지 않아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거라고 한다.

아무렴. 채식음식점은 채식인들만 관심이 있는 곳이라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여도 보이지 않는다.

채식음식점에는 진열장 안에 이미 조리된 여러 가지 요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손님은 원하는 반찬을 두세 가지 골라 손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주인이 잡곡밥 위에 고른 반찬들을 올려서 내준다. 그래서 40밧(1,300원). 태국에서는 이런 채식음식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내 점심식사 선택지가 풍성해졌다. 내 태국 일상에 이런 소소한 작은 행복들이 진주알처럼 하나씩 꿰어지고 있다.


채식음식점에서 싸 들고 온 음식을 교사 휴게실에서 먹고 있었다.  

(물론) 마스크를 벗고 음식을 먹고 있는데 한 태국 교사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태국 셀럽 한 명의 이름을 지목하며 나와 닮았다고 한다.   

여성 축구 감독이라나.   

나는 그 셀럽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휴, 제가 무슨 셀럽을 닮았겠어요. 아니에요~." 손사래를 치고는 묵묵히 남은 밥을 먹었지만 속으로는 ‘누굴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식사 후 교무실 내 자리로 돌아와 몰래 그 셀럽의 얼굴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생김새는 둘째치고 그 셀럽의 나이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찾아본 것을 후회했다.

중년이 되니 별의별 게 다 신경 쓰이네...



팟타이 퍼레이드
시장에서 발견한 보석같은 채식 음식점!
고기 아닙니다. 콩이 한 일입니다.
심지어 편의점에서 파는 베지테리안 덮밥
매거진의 이전글 중년, 소원이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