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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태아보험조차 들지 않은 채 임신을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일이 이렇게 큰 리스크인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막연히 ‘아기 낳고, 복직하면 생활이 다시 궤도에 오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복직은커녕, 치료비 청구서만 눈앞에 쌓여갔다.
한 달에 백만 원씩 추가되는 의료비.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세브란스, 아산, 삼성, 그리고 이름 있는 재활병원은 다 예약했다.
그런데 진료를 받기까지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낮병동 대기는 1~2년.
그 사이 우리 아이는 우유를 잘 삼키고, 소화하고, 분수토를 하지 말아야 하고,
기어야 하고, 서야 하고, 걸어야 하고, 말을 해야 한다.
그 모든 걸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재활치료는 시작되었다.
작업치료 선생님, 물리치료 선생님.
너무 어린 분들 같아 걱정이 됐다. 교과서로만 배운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뻗침이 심해서, 아직 되집기도 안 돼요.
엄마 뱃속에서 근육이 충분히 발달했어야 했는데, 미숙아나 이른둥이들은 보통 그래요.
보세요, 고개도 잘 못 들죠?”
그 설명이, 너무 버거웠다.
아이 상태를 설명하는 말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쳤다.
인터넷에서 이미 다 찾아봤다. 뇌성마비 아이들이 뻗침이 심하고, 되집기, 네발기기, 걷기조차 어렵다는 걸.
그게 내 아이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걸.
하루에 물리치료 1시간, 작업치료 1시간을 받기 위해
왕복 1~2시간의 이동 시간을 감수해야 했다.
외출 준비도 전쟁이었다.
기저귀, 물티슈, 이유식, 간식, 약, 유모차까지 바리바리 싸야 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그 고된 여정을 반복했다.
“좀 아이가 크면, 낮병동 등록해 보세요.”
“낮병동이요? 그게 뭐예요?”
“병원에 오전에 입원해서 6시간 집중 재활 치료 받는 거예요.
물리 1, 작업 1, 오후에 또 물리 1, 작업 1.
전기치료도 병원에 따라 들어가요.”
밤엔 아이가 자다가 토하고,
먹다가 토하고,
이불 빨래는 거의 매일 돌렸다.
제대로 잠을 자 본 기억이 없다.
‘아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우는 거겠지’ 하며 견뎠지만,
솔직히 웃었던 날보다 울음과 걱정이 많았던 나날이었다.
나는 매일 피로했고,
남편은 대출과 회사 스트레스로 지쳐 있었고,
나를 돌볼 여유는 없었다.
“자기가 좀 도와주면 안 돼?”
“나도 힘들어.”
“그럼 치료비라도 좀 보태주면 안 돼?
이 시기를 놓치면 아이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될 수도 있어.
아직 목도 못 가누고, 뒤집기도 안 해. 기어 다닐 생각도 안 해.
치료받을 때도 계속 울기만 해.”
“무슨 갓난쟁이를 데리고 치료를 다녀.
가서 울기만 한다며? 그냥 다른 엄마들처럼 집에서 키워.
병원은 자기네 면피하려고 그러는 거야.”
“병원에서 뇌출혈, 백질연화증으로 소뇌 손상이라잖아.”
“맘카페 보면 정상 발달하는 애들도 많더라.”
며칠 뒤, 시어머니가 찾아왔다.
“무슨 애를 데리고 치료실을 다녀.
애들은 그냥 잘 커.
엄마가 유별나서 그래.
때 되면 다 괜찮아져.”
“병원에서 해야 된대요. 여태 다 제 돈으로 하고 있어요.”
“내가 돈 아깝다 그러는 게 아니야.
그 어린애가 맨날 병원 다니느라 고생이잖아.
집에서 잘 먹여야지, 그렇게 싸돌아다니니까 못 크는 거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싸울 힘도, 울 힘도 남지 않았다.
시댁은 한 번도 아이를 봐준 적 없었다.
오히려 시댁에 가면, “며느리 왔으니 밥 차려라, 치워라” 하는 사람들.
그들은 내가 아이를 정상적으로 키워보겠다고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그저 ‘유별난 짓’ 정도로 취급했다.
나는 지금,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다.
병원에서 흘린 눈물,
가족의 무심한 말에 찢긴 마음,
내가 먹는 밥보다 더 신경 쓰이는 치료 일정.
이 모든 게 엄마라는 이름으로 짊어진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