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대하여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와 비로소 도착한 소식 앞에, 나는 기억 속의 운동장을 다시 달리는 그를 본다. 이 글은 그가 머물 수 있는 작은 자리 하나를 남겨 두기 위한 기록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부고로 남는다. 신문 한 귀퉁이에 이름 몇 자와 생몰 연도가 적힌 짧은 문장으로, 혹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얼굴로.
나는 최근에서야 한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였다. 그 친구의 이름을 여기서는 K라고 부르겠다.
우리는 같은 대학을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대학의 같은 시절을 함께 지나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운동장을 밟았으며 같은 계절을 맞았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 나는 대학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다른 길로 흘러갔고, 그 친구는 학교에 남았다.
그래도 우리는 새내기 시절의 풋내를 함께 풍기던 사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우리는 세상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지가 우리를 더 대담하게 만들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 일도 두렵지 않았다. 세상은 넓었고 시간은 끝없이 많다고 믿었다.
대학 1학년의 봄은 언제나 날씨가 좋았다. 강의실 창문으로 들어오던 햇빛과 먼지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교수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흐르고 우리는 종종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에는 막 시작된 계절이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
“이 날씨에 수업 듣는 건 죄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로 우리는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우리는 서로의 공모자였다. 잔디 위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이유도 없이 시내로 나가기도 했다. 그날의 목적은 특별히 없었다. 그저 봄이라는 계절 속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셨고 어른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를 뱉으며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조금씩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움이 바로 청춘이었다.
K도 그 자리들 중 하나에 있었다. 그는 운동을 좋아했고 공을 차는 걸 좋아했다. 캠퍼스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모래가 일어나는 운동장 위에서 그는 언제나 조금 더 크게 웃고 조금 더 크게 소리쳤다. 공이 어디로 굴러가든 상관없다는 듯 뛰어다니던 모습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는 모두 세상이 오래 계속될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어떤 시간들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지나간다.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은 여전히 학교에 남아 있었고 나는 다른 길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때 K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도 새로운 길을 가 보겠다고 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입시에 도전해 보겠다는 이야기였다. 준비도 잘 되고 있고 생각보다 순조롭다고 했다. 공부도 잘 되고 있고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나는 이미 학교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조금 멀리서 듣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그가 잘되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거울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해 그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의 시간은 희미하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의 이름은 하나둘 기억에서 멀어졌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일들이 생겼다. 친구들의 얼굴은 점점 과거의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를 한 번 더 만난 적이 있었다. 학교 근처 주점에서였다.
어떤 자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누가 불렀는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또렷하다. 예전처럼 떠들썩하게 웃지는 않았다. 얼굴이 조금 상해 있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말수도 많지 않았다. 우리는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술잔만 몇 번 오갔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끝내 묻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갔다.
얼마 전 대학 시절 친구L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는 K의 대학 동기이자 군대 동기였다. 같은 내무실을 썼고 함께 휴가를 나갔고 제대도 같이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절의 이름들이 하나씩 등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K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때 K의 나이는 서른이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의 죽음은 이상하게 시간 속에서 멈춘다. 그 친구는 말했다.
“그때 빈소에 못 갔어.”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일이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른 채 지나간다. 어떤 날은 너무 바빠서, 어떤 날은 너무 멀어서, 어떤 날은 그냥 시간이 지나가 버려서. 우리는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일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K의 얼굴을 떠올렸다.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모래가 일어나는 캠퍼스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모습으로. 그리고 동시에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학교 앞 주점에서 조용히 술잔을 들고 있던 얼굴.
어쩌면 사람의 기억은 이런 식으로 남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가장 살아 있던 순간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K를 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그는 여전히 스무 살의 봄에 있다. 캠퍼스의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고, 강의실을 몰래 빠져나와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가고, 먹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세상이 우리 것인 것처럼 웃고 있다.
시간은 사람을 데려가지만 기억까지 데려가지는 못한다. 어떤 친구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청춘에서는 가장 오래 살아 있다.
내가 이 글을 굳이 쓰는 이유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기억 속에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문다. 이 글은 그가 머물 수 있는 작은 자리 하나를 남겨 두기 위해 쓰는 글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해 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