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책의 작은 시집 (9) 인사동에서

탁주를 들며

by 푸른책

오래된 골목 끝에서
하얀 탁주 한 사발을 받았다.
잔은 투박했고, 술은 따뜻했다.

벽에 걸린 풍경화 속 사람들은
아직도 그 시절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늦게 도착한 손님이었다.

한 모금 넘기자, 목이 부드러워졌다.
삶이란 것도 이렇겠지,
처음엔 낯설고 뒤끝이 따뜻한 것.


젊은 날엔 철학이 좋아서,
무거운 말을 모으곤 했다.
이젠 그런 말보다,
막걸리의 거품이 더 믿음직하다.

밖에선 풍물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웃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 순간 나는 문득,
천상병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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