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의 실험실 — 마일스 데이비스 마라톤 세션
흑인음악을 떠올리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블루스의 끈적함을 먼저 떠올린다. 늘어진 음, 눌린 감정, 몸에 달라붙는 리듬. 삶의 고단함이 소리에 그대로 묻어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악에서는 이 끈적함을 거의 찾을 수 없다. 대신 남아 있는 것은 정제된 소리, 절제된 노트, 그리고 정확한 프레이징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처음 깊이 듣는 순간, 많은 이들이 비슷한 감각에 도달한다. 아, 이 음악은 단단하다.
이 단단함은 블루스를 버렸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블루스를 철저히 통과했기 때문에 가능한 단단함이다. 마일스는 블루스를 과시하지 않는다. 울리지도 않고, 늘어뜨리지도 않는다. 그는 블루스를 말하지 않고 지탱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비애가 넘쳐흐르지 않는다. 대신 자존이 남는다.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감정을 견디는 태도가 소리로 드러난다. 마일스의 프레이징을 듣다 보면 음 하나가 마치 돌처럼 놓인다. 많지 않은데 가볍지도 않다. 어디에도 쓸리지 않고, 제자리에 정확히 놓여 있다.
이것은 감정의 결핍이 아니다. 감정의 통제다. 블루스가 감정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음악이라면, 마일스는 감정을 안으로 눌러 담는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끈적하지 않고, 때로는 건조해 보일 정도로 단정하다. 그러나 그 단정함 속에는 느슨함이 아니라 긴장이 있다.
마라톤 세션은 이 태도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마일스는 연주자들을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시간을 늘리고, 쉽게 끝낼 수 있는 녹음을 일부러 지연시킨다. 그는 완성된 결과를 원한 것이 아니라, 상태를 원했다. 피로가 쌓이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통제가 흔들리는 바로 그 지점을 기록하려 했다.
이 방식은 폭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매우 계산된 실험이었다. 마일스는 블루스를 다시 울부짖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 감정이 형태를 잃지 않은 채 버텨내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가 만든 것은 장(場)이라기보다 실험실에 가까웠다.
이 지점에서 마일스는 흑인음악을 한 단계 다른 자리로 옮긴다. 억압의 역사와 슬픔의 언어를 반복하는 대신, 그는 그것을 형식과 품위로 전환한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울부짖지 않고 말한다.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
이 모습은 클래식에서 베토벤의 후기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감정을 쏟아내기보다 구조 속에 봉인하는 방식. 마일스의 음악 역시 블루스를 봉인한다. 그리고 바로 그 봉인 덕분에 음악은 더 멀리 간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 마일스는 블루스를 지운 사람이 아니라, 블루스를 품격으로 굳힌 사람이다. 끈적함이 사라진 자리에 허전함이 남은 것이 아니라, 형태를 가진 자존이 남았다.
그 자존은 재즈를 처음으로 우아하게 만들었고, 흑인음악을 비로소 스스로 설 수 있게 했다. 그래서 마일스의 음악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로 남는다. 마라톤 세션은 그 사실을 가장 또렷하게 증명하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