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뜨거운 감자

9부 하드밥의 열기

by 푸른책

비밥은 재즈를 하나의 기준으로 세웠다. 그것은 더 이상 특정한 스타일이나 유행이 아니라, 재즈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기준이었다. 즉흥은 허락되었지만 아무렇게나 허락되지 않았고, 자유는 가능했지만 책임 없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기준이 자리 잡자, 재즈는 비로소 예술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자의식은 동시에 새로운 불안을 낳았다. 이 음악은 누구의 언어인가, 그리고 그 언어는 누구를 향해 말하고 있는가.



비밥 이후의 재즈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같은 기준을 공유하면서도, 그 기준을 감당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비밥의 밀도를 유지한 채, 그 언어를 더 뿌리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고자 했다. 또 다른 이들은 그 밀도를 조정하고, 거리를 두며, 음악을 다른 환경으로 옮기려 했다. 이 두 선택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같은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생존 전략이었다.



하드밥은 그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다. 하드밥은 비밥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밥이 세운 기준을 끝까지 받아들인다. 다만 그 기준 위에서 묻는다. 이 언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고 이 언어는 어떤 삶을 말해야 하는가. 하드밥은 비밥이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비밥이 의도적으로 미뤄두었던 문제를 다시 끌어올린다.



하드밥의 음악은 더 무겁고, 더 뜨겁다. 리듬은 땅에 붙고, 소리는 몸의 높이에서 움직인다. 블루스와 가스펠, 교회의 호흡과 거리의 억양이 다시 음악 안으로 스며든다. 이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하드밥은 비밥 이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대신 비밥 이후에도 지워질 수 없는 정체성을 회수하려 한다. 이 음악은 단순히 더 열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짊어지기 때문에 뜨겁다.



이 선택의 중심에는 아트 블레이키가 있다. 그의 드럼은 시간을 조용히 유지하지 않는다. 블레이키의 리듬은 늘 앞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으며, 음악을 앞으로 밀어낸다. 그는 재즈가 다시 한 번 공동체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밴드에서 연주는 개인의 성취이기 전에 집단의 선언에 가깝다. 하드밥은 이 지점에서 윤리를 획득한다. 이 음악은 혼자만의 언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가 되기를 선택한다.



호레이스 실버의 음악은 이 윤리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그의 곡들은 기억하기 쉽고, 선율은 명확하며, 리듬은 자연스럽게 몸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 친근함은 단순함과 다르다. 실버는 비밥의 복잡한 사고를 유지하면서도, 그 결과를 공동체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참여하게 만든다. 하드밥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재즈의 목적을 묻는다. 이 음악은 누구를 위해 연주되는가.



하드밥이 뜨거워진 이유는 단순한 반발이나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비밥 이후의 재즈 세계에서, 흑인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보편적 예술로 흡수되는 동시에, 정작 자신들의 삶과는 멀어지는 상황을 마주한다. 클럽과 음반 산업, 평론과 교육의 언어 속에서 재즈는 점점 정제되고 중립화된다. 하드밥은 이 중립화를 견디지 않기로 한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다시 자기 자신이 되기로 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었다. 같은 비밥의 유산을 두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 음악도 존재한다. 감정을 식히고, 속도를 낮추며, 소리를 배치하는 음악. 이 음악은 다시 한 번 재즈를 생각의 대상으로 고정하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선택의 출발점에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있다는 사실이다.



마일스는 하드밥의 윤리를 이해했지만, 그 길을 자신의 길로 삼지 않는다. 그는 비밥 이후의 긴장을 ‘정체성의 회수’로 해결하지 않는다. 대신 거리를 둔다. 감정을 절제하고,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을 남기며, 즉흥을 과장하지 않는다. 이 태도는 하드밥과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출발점은 같다. 비밥이라는 기준 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거리 두기의 미학에는 길 에반스의 역할이 깊게 배어 있다. 길 에반스는 연주자가 아니라 설계자였다. 그는 재즈를 즉각적인 반응의 음악에서, 사유를 전제로 한 음악으로 옮겨놓는다. 소리를 줄이기보다 분산시키고, 솔로를 억제하기보다 공간을 설계한다. 그의 작업은 쿨 재즈가 ‘백인의 음악’으로 오해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조 덕분에 재즈는 새로운 청취 환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두 선택, 하드밥과 쿨 재즈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다시 불을 피웠고, 다른 하나는 불을 관리하려 했다. 이 대비는 비밥의 유산이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기준이 생겼기에, 서로 다른 전략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 갈림길을 더 멀리서 바라보면, 이미 한 세대 앞에서 이 질문을 음악으로 던진 인물이 떠오른다. 조지 거쉬윈이다. 그는 재즈 음악가가 아니었고, 즉흥의 세계에 몸을 던진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대중의 언어와 예술의 언어가 정말로 분리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졌다. 그의 작업은 번역에 가까웠고, 그 번역은 확장이자 동시에 긴장의 씨앗이었다.



하드밥의 음악가들이 느꼈던 불안, 자신들이 만든 언어가 자신들을 떠난다는 감각은 사실 거쉬윈의 시대부터 이미 시작된다. 하드밥은 이 흐름을 되돌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맞서 다시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 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쿨 재즈는 그 흐름을 관리하고, 재배치하려 한 선택이었다. 이 모든 것은 비밥 이후에야 가능해진 질문이다.



그래서 하드밥과 쿨 재즈는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다. 하나는 다시 뜨거워지기를 선택했고, 다른 하나는 차가움을 유지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두 선택 모두, 재즈가 더 이상 장식으로 남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에만 가능한 길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두 갈래 중, 감정을 식히고 거리를 선택한 음악을 따라간다. 비밥 이후, 재즈가 왜 차가운 얼굴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차가움이 어떻게 또 다른 혁신의 조건이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 〈새로 쓰는 재즈 히스토리〉 10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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