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 공간, 사건, 시간 기억

by 생각하는뇌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들 중 새로운 사건에 대한 기억은 해마에서 만들어진다.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건이 발생한 당시의 공간, 그리고 사건의 순서(시간) 모두를 기억해야만 가능하다. 그 두 가지는 어떻게 해마에서 처리되는 것일까? 그 힌트를 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소 세포, 공간을 기억하다


쥐의 해마에는 장소 세포(place cell)라고 하는 특이한 뉴런이 존재한다. 이 뉴런은 특정 장소에 있을 때만 반응한다. 안방에 있을 때는 안방 장소 세포가 발화되고, 거실로 나가면 거실 장소 세포가 발화된다. 이렇게 특정 장소에 있을 때만 발화되는 장소 세포를 보고 존 오키프(John O'Keefe)는 장소 세포가 공간에 대한 기억을 담당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사람에게도 해마 내에 쥐의 장소 세포와 비슷한 뉴런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런 장소 세포의 역할은 종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쥐의 장소에 대한 기억은 토끼의 것과 조금 차이가 나고, 이 기억은 또 사람의 것과 차이가 난다. 쥐는 해마에 손상을 입으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한 후에 원래 자리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은 해마에 일부 손상을 입었을 때에도 그 기능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이런 것을 보면 공간 정보를 어떻게 해마에서 처리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과제가 많지만, 적어도 장소 세포처럼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공간적인 요소를 기억하는 체계가 우리 뇌에 있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격자 세포가 장소세포에 움직임 정보를 준다


그런데 우리는 한 공간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도 책상에 앉아있기도 하고, 옷장을 들추기도 하며, 침대에 잠자러 눕기도 한다. 이런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장소 세포 하나만으로 기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몸에는 그런 이동에 관한 기억을 담당하는 세포 또한 존재한다. 해마와 정보를 주고받는 뇌의 후내 피질(entorhinal cortex)에 있는 격자 세포(grid cell)가 바로 그것이다.


격자 세포는 한 공간 안에서 일정 간격 떨어진 지점으로 이동할 때만 활동한다. 마치 현실 세계에 일정 간격으로 좌표(격자)를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칸 이동할 때마다 알려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격자 세포는 시각적인 정보 없이도 방향과 이동에 대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장소 세포격자 세포가 함께 작용하면 우리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를 밝혀낸 에드바르 모세르(Edvard Moser)와 그의 전부인 마이브리트 모세르(May-Britt Moser) 또한 2014년에 앞에서 언급한 존 오키프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3명의 공로로 사건 기억 중 공간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밝혀진 것이다.


시간 세포도 존재한다


그러면 시간은 어떻게 기억할까? 시간에도 시간 세포라는 뉴런이 존재할까? 물론 시간 세포도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장소 세포와 다르게 시간적인 요소에만 반응하는 특정 세포들이 있는 것을 알아냈다. 한 쥐가 그대로 직진하는 경우와 방 안의 미로를 돌아다니는 경우에 발화되는 뉴런을 보니, 두 경우 모두 공통적으로 발화되는 뉴런들이 존재했다.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도 기억을 떠올릴 때 이 뉴런들이 발화되는 순서는 똑같았고, 과학자들은 이 뉴런들이 발화되는 순서를 통해 쥐가 시간을 인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시간 세포의 발견이다.



timecell.jpg 움직임이 달라져도 빨주노초...순서로 시간세포가 발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시간 세포에 관한 여러 가지가 아직 많이 밝혀지지 않았고, 공간 세포와 시간 세포가 서로 비슷한 영역에 위치하며 심지어 두 세포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뉴런이 있다는 결과도 있어서 아직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명확하게 다 알려진게 없어서 아쉽지만, 계속해서 지식이 쌓여간다면 분명 훗날 사건 기억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장소 세포가 발화될 때 생기는 세타파의 리듬을 통해 사건의 순서를 인지한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특정 장소에 있을 때 장소 세포가 발화되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는데, 신기하게 움직일 때에 장소 세포의 뇌파 중 세타파를 측정하니 특정한 리듬으로 그 발화가 일어났다. 본래 뉴런이 반응하는 타이밍은 특정한 리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리듬을 확인해 보니 주로 움직이는 행위를 할 때, 그리고 REM 수면을 할 때 이러한 리듬이 관측되었다. 그리고 일정 리듬 안에서는 한 장소 세포가 딱 한 번만 발화되는 것을 확인했다. 세타파가 한 번 고점을 찍고 다음 고점을 찍기 전까지 여러 장소 세포가 같이 발화되어도 그 안에 한 장소 세포는 한 번만 발화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어쩌면 사건의 순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장소 세포의 발화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이라는 이론도 존재한다.


오랫동안 해마가 어떻게 사건 기억을 만드는지, 그 사건 기억이 어떤 식으로 저장되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이제는 사건 기억보다 더 나아갈 차례다. 다음 시간에는 사건 기억과는 조금 다른, 의미 기억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keyword
이전 04화2-2. 기억의 메커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