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면 기억에 대해 많은 것을 안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것은 사실 일부일 뿐이다. 우리 뇌가 얼마나 크고 복잡한 구조인데 해마 하나로 모든 기억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억 - 더 정확히는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의식하는 기억에 대해서 충분히 많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지만, 한가지 더 알아보면 좋을 기억이 있다. 우리가 "기억한다"라고 말할 때 사건에 대한 경험 말고 자주 쓰는 경우에 대한 기억이다. 아마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을 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알아볼 것은, 바로 의미 기억이다.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은 사건이 아닌 사실에 관한 기억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려워보이지만, 예를 보면 쉽다. 대표적으로 언어가 있다. 우리가 외우는 영단어의 뜻은 공간과 시간과 그닥 연관이 없다. Apple이 사과라는 것도, 사과가 아삭한 식감의 붉은(혹은 푸른) 과일이라는 기억을 만들 때에는 해마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언가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의미 기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도 설명을 시도해오기도 했다. 철학적으로는 '개념'이란 단어로, 의미론에서 다루어졌다. 그리고 그 의미론을 다루는 철학의 분야는 시대마다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알맞은 개념이 고유함(le propre, 특유함)에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l'essence)에 반영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여 개념이 사물의 본질을 표현해야한다고 보았다. 이후 스콜라철학에서 개념이 본질과 어떻게 관계맺는지에 대해 실재론(사물보다 개념이 먼저), 유명론(사물이 있고 그 다음에 개념을 만듦), 그리고 개념론(사물 안에 개념이 현존)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개념 자체에만 집중하기 보다 더 나아가 인식이 어떻게 개념을 만드는지에 대해 초점을 두었다. 개념이 그 자체로 있기보다 인식을 통해서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개념화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철학, 더 나아가 인지 철학이라는 분야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인지 철학은 현재에도 뇌과학에 뼈대를 제공하며, 뇌과학의 발견에 영향을 받으며 현재에도 함께 발전하고 있다.
지금까지 뇌과학적으로 의미 기억에 대해 밝혀진 사실을 몇가지 살펴보면, 먼저 의미 기억은 대뇌피질 중에 측두엽에 저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마에서 처리되는 기억 중 처리할 수 없는 정보 중 사건 기억과 관련을 가진 특정 기억이 의미 기억으로 변환되는 것 같다. 우리 뇌는 깊이 자고 있는 non-REM 수면 동안에 깨어있는 동안의 기억을 영화관처럼 머릿 속에서 재생하는데, 뇌의 시각 패턴을 살펴본 결과 깊이 잠잘 때 해마와 비슷한 뇌의 패턴이 측두엽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해마에서 사건 기억을 반복 재생하는 과정에서 처리할 수 없는 정보들(의미 기억도 포함)이 뇌의 겉쪽에 있는 대뇌피질로 전송되고 그 중에서도 측두엽에 저장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이런 정보로만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미 기억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 뇌과학적으로 밝히기에 앞서서, 철학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인식(perception)과 구상(conception) 사이에 얼마나 거리가 가까운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거기에 사람의 개념이 가지는 특징인 일반화에 대해서도 아직 이해가 부족하다. 지금 AI에서도 사람의 일반화가 어떻게 적은 정보로도 개념을 쉽게 익히는지 알지 못 해서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데이터를 학습하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의미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져 어떻게 사용되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어찌보면 의미 기억에 대한 연구는 사건 기억 중 시간 기억에 대한 연구보다도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이라고 하면 사건에 대한 경험 말고도 개념에 대한 기억이 꼭 언급해야하는 존재이기에, 한 번 다른 분야의 지식을 가져와서라도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