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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장 후 불러오기

by 생각하는뇌

기억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기억 - 특히 사건 기억과 의미 기억이 어떤 식으로 저장되는지 알아보았다. 그래, 저장이다. 우리는 단지 저장을 했을 뿐, 그걸 꺼내 쓰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재밌게도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에는 기억과 의식이 혼합된 개념으로, 따로 분리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인지 과학의 탄생으로 기억과 의식을 분리해서 분석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의 기억에 대한 생각이 만들어졌다. 마치 저장하고 불러오는 것이 컴퓨터 파일 같지 않은가? 이렇게 컴퓨터와 사람의 정보 처리 과정을 유사하게 두고 분석하는 것도 195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즉 아직 100년도 되지 않은 연구인만큼, 기억을 회상하는 방법에 대한 확실한 이론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쓸만한 지식 몇 가지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밝혀졌다.


먼저, 기억은 의외로 우리가 떠올리고 싶은 것만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상기하는 것(recall)은 떠올린 것(retrieval) 중에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recognition)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기억해 낸다'라고 할 때 우리가 원하는 정보만 쏙 빼오지 않고, 정보를 덩어리로 들고 와서 그 안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덩어리를 찾을 때 사용되는 기관은 역시나 해마다(새삼 기억에서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해마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가설은 이러하다. 우리가 어떤 단서를 보고 기억을 상기할 때, 해마가 가장 먼저 단서에 반응한다. 이 반응은 500ms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데, 이 시간 안에 성공적으로 반응하면 그 단서를 토대로 기억이 담겨있는 회로를 찾아간다. 이전 글에서 기억은 신호가 이동하는 패턴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즉 기억을 상기한다는 것은 이전에 기억한 대로, 즉 기록된 패턴대로 회로에 신호를 다시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극된 회로에서 각각 기억의 부품이 조금씩 모여 다시 해마로 돌아와 조립되어 우리가 기억했을 때의 순간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 여기까지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대 1500ms, 즉 1.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AI에 검색했을 때 답변을 얻는 데에도 수 초가 걸리는데, 이미 우리 뇌는 1.5초 만에 그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순간을 재현한다는 점이다. 재미있게도 의미 기억을 상기할 때, 우리는 그 의미만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덩어리라고 언급했듯이, 의미 기억은 그 기억이 만들어질 때의 단서와 함께 저장된다. 즉 '아이팟'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의미적으로 '애플이 만든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의 제품명'으로 저장되어도 실제로 기억을 상기할 때는 그 의미만 아이팟의 이미지, 아이팟을 내게 보여주던 친구의 모습, 그걸로 음악을 듣던 순간처럼 아이팟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단서들이 함께 떠오른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우리 뇌는 이러한 단서를 그 의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의미가 비슷한 단어보다도 의미랑 관련 없는 단서가 특정 기억을 더 잘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내 예를 들면, 중학교 때 친구가 보여준 아이팟이 예뻐서 그 친구를 보면 항상 아이팟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지만 애플이라는 회사명을 보면 오히려 아이폰, 에어팟 같은 제품들이 떠올라도 오래전에 출시한 아이팟은 잘 떠오르지가 않는다.


이 이론은 중독을 해결하는 데에도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다. 술이 담겨있는 술병을 보는 것보다 그 술을 마시게 된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오히려 충동이 더욱 심하다. 그렇기에 그런 스트레스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이 포함되지 않으면 중독 치료에 있어 큰 어려움이 생긴다. 이런 극단적인 예시가 아니어도 커피를 볼 때보다 졸릴 때 커피가 당긴다거나, 아니면 소주병을 볼 때보다 오랜 친구를 만났을 때 술집에 가고 싶어 진다는 것이 모두 생명과학적인 뇌의 메커니즘 때문이라는 점이 참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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