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10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노벨 생리의학상에 위대한 과학자 3명이 발표되었다. 테마는 신경계에서의 신호의 전달. 더 풀어 말하자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뇌로 어떻게 전달되어 저장되는지를 처음으로 밝혀낸 공로였다. 이 3명의 과학자가 아니었다면 파킨슨 병과 같은 퇴행성 질환이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우리가 기억력을 높일 수 있는지 모든 정보가 아직도 미궁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이 날은 기억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에도 굉장히 유의미한 날이기도 했는데, 바로 3명의 과학자 중 에릭 캔들(Eric Kandel)이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의 차이를 어떻게 만드는지를 밝혀내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크게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단기 기억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억이라고 하는 건 오래전의 일들을 이야기보따리에서 꺼내는 장기 기억, 특히 그중에서도 사건 기억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기 기억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가령 당신이 핸드폰 문자에 온 인증번호를 입력할 때를 생각해 보자. 6자리 숫자가 문자 창에 뜨면 그대로 그걸 한 번만 보고도 입력창에 인증번호를 입력할 수 있다. 하지만 인증번호를 입력하고 나서 1분이 지났을 때 그 숫자를 기억해 낼 수 있는가? 이러한 경험이 바로 단기 기억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이다.
장기 기억은 암묵적 기억(implicit memory)과 명시적 기억(explicit memory)으로 나뉜다. 암묵적 기억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는 장기 기억으로, 어릴 때 자전거를 배운 사람은 시간이 훌쩍 지나도 자전거를 무리 없이 잘 탈 수 있는 "몸으로 기억"하는 경우이다. 반대로 명시적 기억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명시적 기억 중에서도 사건 기억(episodic memory)은 경험에 대한 기억으로, 어제 내가 본 영화의 내용을 친구한테 설명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기억과 같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한다면 흔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사건 기억이다. 그리고 그 사건 기억에 가장 중요한 기관을 꼽자면, 해마만 한 것이 없다.
해마(海馬體, hippocampus)는 대뇌 표면에 위치한 대뇌 피질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간 끝에 위치해 있다. 좌우 대뇌 반구에 각각 있으며, 그 위치보다도 이름이 참 재밌는 기관이다. 바다(海)의 말(馬)이라는 뜻과 같이 바닷동물인 해마한테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실제로 두 해마를 옆에 두고 비교하면 그 형태가 굉장히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정확한 역할을 확신하기는 어려웠는데, 1953년 한 치료 과정에서 이 해마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비밀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헨리 모라이슨이라는 한 난치성 뇌전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해마를 포함한 뇌의 일부를 잘라냈다. 그러자 그는 이후로 새로운 사건을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해마가 사건 기억에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고, 이후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좌측 해마는 최근의 일을, 우측 해마는 태어난 이후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해마의 핵심 기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억에 있어 해마가 독보적인 위치를 가지게 만들어주는 공고화(consolidation)다. 공고화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변환시켜 주는 기능이다. 해마는 시각, 청각, 등등 모든 감각 신호가 지나는 곳인 만큼 우리가 겪고 느끼는 모든 경험을 장기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기억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해마의 기능은 방향과 위치를 기억하는 공간 기억(navigation)이다. 치매 환자의 증상을 생각해 보자. 치매 환자는 분명 방금 있었던 일인데도 까먹고, 밖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린다. 이것은 치매, 특히 알츠하이머 병이 가장 먼저 악영향을 미치는 기관이 해마이기 때문이다. 해마가 다쳐서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꿀 수 없으니 자주 까먹고, 공간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마에서 기억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는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