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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꽂쌤 Mar 02. 2023

우울

 느껴도 좋고, 드러내면 더 좋고

우울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실수,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했거나 양심상 이기적으로 생각되는 모든 생각들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괴로워한다. 정신분석학자 Freud는 우울한 사람들에 대해 '우울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부분을 타인에게 거두어들여서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라고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약점도 과도하게 부풀려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나치게 자신을 미워한다. 이러한 현상을 '안으로 향한 분노'라고 한다. 


Abraham이라는 학자는 우울한 사람들의 경우 너무 일찍 또는 너무 갑자기 젖을 떼거나 때 이른 좌절 경험 때문에 정상적인 적응이 방해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비만이거나 먹고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키스에 집착하는 구강기적인 만족을 추구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흥미로운 주제로 보이는 것 같다. 


우울한 사람들은 내사하는 경우가 많다. 내사는 다른 사람의 관점이나 가치관에 있어서 논리적인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여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른 대상이 실제로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내사 경험으로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왔는데 다른 친구들은 엄마, 오빠, 언니가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왔는데 나 혼자만 엄마가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아서 비를 맞고 집에 간 적이 있다. 집에 갔을 때 엄마는 방에 있었는데 내가 집에 도착하자 방문을 열고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나는 그때 '집에 엄마가 있었는데 왜 나를 데리러 나오지 않았지?'라는 의아함과 동시에 '엄마가 나를 챙기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른이 되어 자기 분석을 하게 되면서 그 상황에서 엄마는 허리가 안 좋아 고질적인 고통이 있던 상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의 나는 엄마의 건강과는 무관하게 '버림받았다'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이렇듯 우울은 어떤 대상이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을 향한 부정적인 마음이 들면서 그 부정적인 마음 때문에 죄책감이 들 수 있다. 엄마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느끼는 것과 같다. 


우울은 나는 나쁜 사람이고 나 때문에 상대방이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착한 사람처럼 굴어야 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모습은 우울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적대적 감정을 처리하는 습관이 된다. 부모님이 자녀를 방치하고 학대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내가 착한 아이가 되면 부모님은 달라질 거야'라고 착각하거나 폭력을 가하는 남편에게 '내가 더 좋은 아내 역할을 하면 남편이 나를 학대하지 않을 거야'라고 믿으며 쉽게 그 곁을 떠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우울이 심한 사람은 모든 실수를 자기 탓으로 여긴다. 이러한 자기 탓 습관은 '내가 뭔가를 바꾸면 상대방도 달라질 거야'라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무력한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나에게도 힘이 있어'라는 뒤틀린 느낌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이것을 힘이라고 표현해도 되는가 싶다.) 


우울한 사람은 '이상화'라는 방어를 사용한다. 자기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나쁜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누군가 알면 자신을 버리고 떠나버릴 거라고 믿는다. 이러한 자존감의 손상은 타인을 이상화하게 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과하게 높이 평가하고 그에 반해 자신은 지나치게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보상하기 위해 다시 이상적인 대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게 되는 반복적인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어린아이에게 상실 경험이 있거나 아이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마땅히 슬퍼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는 경우 우울한 성향이 드러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한 경우 아직 이별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왜 헤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복잡한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다. 이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현실적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에 있어서 무관심하거나 방치할 때 우울이 생길 수 있다. 슬픈 일이 생겼거나 납득하지 못할 상황들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적절히 설명해 주거나 바라 잡아준다면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는 것들인데 이를 모른척하고 덮어버리고 넘어가게 되면 우울로 발전할 수 있다.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아동에게 '슬퍼하지 마 내가 너를 잘 돌볼 거야'라든가 '떠날 사람은 떠나는 거야 그게 삶이지 그러니 더 이상 그리워하지 말자.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이별과 슬픔을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다. 30분 울어야 하는 일은 30분을 울어야 하고 1시간을 울어야 하는 일은 1시간을 울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구나'라고 느끼며 '슬프다는 것은 안 좋은 거구나' '위로를 받기 원하는 마음은 옳지 못한 거구나'라는 파괴적인 결론을 내리고 만다. 정상적인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요구적인 태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믿게 된다.


우울한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 중에 하나는 지나치게 박애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집착하는 반면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취약하다.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매달리는데 이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 내면에 있는 죄책감이나 열등감을 지우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선한 행동을 통해 무너진 자존감을 유지하려 하고 비밀스러운 우울감을 감추려 한다. 이들에게 사회적 자선행동을 멈추게 한다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힘이 없거나 우울한 어른들을 곁에 두고 자란 아이는 더욱더 이러한 신념이 발달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은 대물림된다. 어른들에게 적응적으로 기대하지 못하고 의존하지 못하는 아이는 정서적 박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울한 사람들은 다름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나 내쳐짐에 대해 두려워한다. '내가 나빠서' '내가 부족해서' 저 사람이 떠날 거야 라는 신념이 있다. 혼자 있을 때 불행하다고 느끼며 누군가 자신을 떠나간다면 그 이유가 분명히 자신에게 있다고 여긴다. 


우울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온전한 수용이나 공감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울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과도한 배려를 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에게 한 없이 보살핌만 제공한다면 의존적인 관계가 되기 쉽다. 어느 정도의 분리경험과 분리 이후에도 여전히 친밀한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결국은 헤어진다고 해서 영영 분리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되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상실과 슬픔을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관계의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나에게 고마운 사람인데 어떻게 제가 그럴 수 있겠어요'라고 하면서 고마운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하나의 대상에게는 고마움도 느낄 수 있고 화가 날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드러내기 힘든 감정을 드러내도 되는 경험,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느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좀 더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감정을 회피하도록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부족하고 말할 시간이 부족해서 언어가 조각이 나고 있다. 감정을 없애버리기 위해 약이나 카페인을 수시로 들이키고 있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약해 빠진 것이라 여기며 묵살한다. 이럴수록 우울한 사람들은 늘어나고 강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급증한다. 약물에 의지하고, 먹는 것을 탐닉하고 한탕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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