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USTOM 에서

by 고래 아저씨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봄 손님은 올해도 어김없이 그 부지런함을 앞세워 내 주변에 찾아왔고 덕분에 호강할 것없는 나의 일상에도 봄이 찾아왔다. 봄 내음은 어쩐지 새로운 분위기를 부르는 날이다. 그렇다고 진해를 갈 수 도 없는 상황에서 발걸음을 멈춘 곳은 수원 SK스카이뷰에 있는 KUSTOM 커피숍이다. 처음엔 그저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평범한 동네 카페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일상의 분위기와는 사뭇다른 질감이 확연히 달라짐을 느껴진다.


각자의 주문

아늑한 카페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것을 마시며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묘한 공간이다. 누군가는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누군가는 고소한 라떼(인생라떼란다)로 지친 마음을 달랜다. 그 모습이 마치 수영장의 레인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속도로 물살을 가르는 풍경과 닮아 있었다. 커피 주문 하나에도 그 사람의 굳건한 취향과 그날의 미묘한 컨디션이 고스란히 담긴다. 메뉴판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고민 끝에 고른 나만의 음료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니, 비로소 나의 레인을 찾은 듯한 안도감이 밀려온다. 누군가는 산미가 감도는 원두를 고르고, 누군가는 묵직한 고소함을 선택하며 각자의 아침을 연다. 이 작고 네모난 공간 안에서 저마다의 기호가 존중받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따뜻하게 다가온다.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을 타인과 세상 앞에 조용히 드러내는 일이다. 내가 주문한 음료 한 잔이 오늘 나의 정체성을 대신 말해주는 명함처럼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커피한잔에 나를 찾는 듯한 느낌이다.


커피가 주는 것

창밖으로는 도심의 느낌과 작은 수목들이 도심 속 작은 공원이다. 카페에서 세상을 보는 일은 언제나 시야의 환기를 가져다준다. 사무실(일상공간)에 발을 딛고 있을 때는 빽빽하고 숨 막히게 느껴지던 건물과 도로들이, 카페에서 보면 꽤나 정겹고 평화롭게 보인다. 우리의 팍팍한 삶도 이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가까이서 문제들을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답답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의외로 자연스러운 흐름이 보인다.

시선을 조금 더 옮기면 바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저 작은 점들 속에 불과 몇 시간 전의 내 모습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뷰가 좋은 카페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마음을 누이는 여유로운 여백이다. 아등바등 살아가던 일상에서 잠시 로그아웃을 하고 나를 관망하는 기분이다. 높은 곳에서 마시는 커피가 유독 달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이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KUSTOM이라는 이름

가만히 잔에 새겨진 로고를 보다가 문득 'KUSTOM'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영어 'CUSTOM'에 'K'를 붙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뻔한 길을 가지 않겠다는 재미있는 선언처럼 들린다. 세상이 정해놓은 표준의 레시피를 따르되, 어딘가 살짝 비틀어 나만의 방식으로 변주하겠다는 뜻일 테다. 완벽한 영법의 수영 폼을 배우더라도 결국 자신의 신체에 맞게 헤엄치는 법을 터득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비슷한 하루라는 재료를 받았지만, 저마다 다르게 볶고 추출하며 살아내고 있다.

세상에 똑같은 입맛이 없듯, 인생에도 정답인 레시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남들과 똑같은 라떼에 샷 하나를 뻔뻔하게 추가할 줄 아는 여유에서 진짜 개성이 나오는 법이다. 그렇게 나만의 씁쓸함과 달콤함의 비율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남들이 많이 시키는 베스트셀러 메뉴를 따라 고르곤 한다. 하지만 커스텀이라는 단어는 튀지 않고 무리에 섞이고 싶어 하는 사회적 본능을 깨고 네가 원하는 맛을 찾으라고 등을 떠민다.


커피 한 잔이 가르쳐준 것

사실 정말 좋은 카페는 단순히 커피의 맛 하나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적당히 나른하게 떨어지는 조명의 각도, 허리를 곧게 펴게 만드는 의자의 높이, 옆 사람의 대화가 소음이 되지 않는 테이블 간격이 중요하다. 거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음악의 볼륨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이 공간 참 좋다"고 느낀다. 수원 SK스카이뷰에 있는 KUSTOM 커피는 내게 딱 그런 곳이었다. 뭐 하나 과도하게 튀지 않으면서도, 결코 밋밋하지 않은 묵직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이 담백한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너무 힘을 주면 물에 가라앉고, 힘을 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수영의 역설과 같다. 적당한 긴장과 편안한 이완 사이의 그 좁은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은 평생의 숙제다. 이곳의 커피 한 잔은 내게 그 적당한 힘 빼기의 기술을 시각적으로, 또 미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좋은 공간이 주는 보이지 않는 위로란 바로 이런 든든한 균형감에서 비롯된다.


잔 바닥에 남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영으로 몸의 노폐물을 비워내고, 맛있는 커피와 사색으로 마음의 여백을 채운 완벽한 오전이었다. 오늘도 나만의 방식대로 꽤 괜찮은 하루를 커스텀(KUSTOM)했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든다. 수영장에서 내 호흡에 맞는 레인을 찾아 헤엄치듯, 나에게 꼭 맞는 커피 한 잔의 자리를 고르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이 비록 사소해 보일지라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훌륭하고 중요한 연습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따스한 정오의 햇살이 테이블 위로 길게 누워 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의 레인을 꽤 근사하게 출발한 느낌이다. 이곳의 문을 나서면 다시 복잡한 도시의 템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내 손끝에는 아직 나만의 속도를 지켜낸 커피의 온기가 남아 있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기꺼이 나다운 맛을 찾아 기분 좋은 유영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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